주문모 신부를 압록강에서 만나다, 단양 지황

2016.10.18 15:27:14

조혁연

충북대 사학과 초빙교수

중국과 바티칸 교황청이 머지 않아 수교를 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가톨릭 영세자는 이승훈(李承薰, 1756~1801)이다. 그는 1783년(정조 7) 12월부터 40여일 동안 북경에 머무르면서 필담으로 천주교 교리를 배운 후 이듬해 1월 북경교구 그라몽(Louis de Grammont) 신부로부터 영세를 받았다.
 
당시 조선은 중국교구에 속해 있었다. 그는 1784년 귀국해 임의로 천주교 제도를 만들어 미사를 올렸다. 그러나 문득 어느 날 그 같은 행위가 천주교 교회법에 합치하는 것인지 의문이 생겼다.
 
그는 믿음이 깊은 윤유일(尹有一)을 보내 천주교 북경교구장 구베아(Alexander de Gouvea) 주교에게 유권해석을 요청했다. 구베아 주교는 "교회법에 어긋나는 행위"라며 책망했다.
 
이때부터 첫 영세자 이승훈을 중심으로 외국 성직자 영입운동이 일어났다. 구베아 주교는 이에 화답해 처음에는 도스 레메디오스(dos Remedios) 신부를 조선에 파견하고자 했다. 그러나 레메디오스 신부는 조선인 밀사를 만나지 못하면서 조선 입국에 실패했다.
 
그 후속으로 선발된 인물이 조선 최초의 외국인 선교사인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1752~1801)이다. 강소성 소주 출신인 그는 과거를 보았으나 계속 낙방하자 20살 때 결혼했다. 그러나 3년 만에 아내와 사별하고 홀로 지내다가 늦은 나이에 북경교구 신학교에 들어갔고, 1회 졸업생이 됐다.
 
조선 조정의 박해를 우려한 구베아 주교는 주문모를 조선에 파견하는데 있어 얼굴이 조선인과 닮은 점을 우선적으로 고려했다. 1794년(정조 18년) 봄에 북경을 떠난 주문모는 그해 12월 하순이 돼서야 한중 국경인 압록강에 도달했다.
 
이때 압록강에서 주문모와 비밀 접선에 성공. 국내 입국을 안내할 인물이 우리고장 단양 출신인 지황(池璜, 1767~1795)이다. 주문모는 국내 밀입국한지 5개월만에 배교자 한영익(韓永益)의 밀고로 ㅤ쫒기는 몸이 됐다. 《순조실록》은 이때의 주문모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이때에는 이른바 주문모라는 자가 스스로 양교(洋敎) 중에서 왔다고 핑계하여 몇해를 관통하니 변방 북쪽의 호흡이 바로 맞닿았었고 만리 지척에서 강남(江南)의 종적을 누가 알았으랴. 변문에 쇄약의 엄함을 잃어 벌과 전갈이 소매 속으로 들어왔고 서울에 오랑캐의 숨음이 있어 물여우가 쏘려는 모래를 머금은 것과 같았다."-<순조실록 1년 12월 22일자>
 
이때 주문모의 도피는 돕던 지황 등도 체포됐다. 이와 관련해《순조실록》은 지왕과 주문모의 관계를 "지황과 윤유일 같은 자는 앞에서 보좌하였고 황심(黃沁)과 옥천희 같은 자는 뒤에서 소개하였었다"라고 표현했다. 황심과 옥천희는 이른바 황사영 백서를 구베아 주교에게 전달하려 했던 인물이다.
 
같은 날짜 《순조실록》은 '사나운 이리의 심장(心腸)과 사람을 홀리는 여우의 낯짝'이라고 표현하는 등 매우 저급한 용어를 동원해 황사영을 공격했다.
 

경기도 이천시 모가면 어농성지의 지황(사바)의 묘.

지황은 1795년 6월 심한 매질을 당한 끝에 옥중에서 순교했다. 그의 실제 묘는 순교 후 시신이 한강에 버려져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천주교는 그의 순교 정신을 기리기 위해 어농리에 의묘(儀墓)를 만들었다.

/ 충북대 사학과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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