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기가마 옆에 황사영 토굴을 만들다, 김귀동

2016.10.04 15:53:52

조혁연

충북대 사학과 초빙교수

신유박해 떼 황사영(黃嗣永, 1775-1801)은 제천시 봉양면 구학리 배론의 토굴(土窟)로 피신, 이곳에서 '황사영 백서'를 작성하였다. 이때 토굴 안의 황사영에게 신유박해의 참상과 바깥 정보를 전달해준 인물이 김한빈(金漢彬, 1764-1801)이라고 전회에 밝혔다.

토굴의 사전적인 의미는 '땅을 파서 굴과 같이 만든 큰 구덩이'이다. 이런 토굴은 수평굴인 횡혈(橫穴)과 수직굴인 수혈(竪穴)로 나눠진다. 배론 토굴은 횡혈로 그리 깊지는 않다. 배론 토굴을 만드는 데는 김한빈보다 당시 이곳에서 옹기점을 운영하던 김귀동(金貴同, ·~1802)이라는 인물이 더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파악된다.

김귀동이 배론을 찾은 목적에 대해서는 사료마다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신유박해에 관한 정부측 기록을 수집·정리한 책으로 『사학징의(邪學懲義)』가 있다. 줄여서 '징의'라고도 부르는 이 책에는 당시 천주교 신자들의 사회적 신분·직업 및 입신 동기, 신앙활동 등의 내용이 기록돼 있다. 『사학징의』는 김귀동 자백 내용을 '저는 본디 고산(高山) 사람입니다. 제천(堤川)의 흙과 나무가 좋다는 말을 듣고 옹기를 구어 생활의 터전을 마련하려는 계획으로 올해 2월 초승에 배론 산중으로 옮겨 왔습니다'라고 신앙보다 호구지책이 먼저였던 것으로 기록하였다.

인용문의 '고산'은 전남 완주면 고산면을 가리킨다. 그 뒤에는 '같은 달 말경에 김한빈이 이가(李哥)라고 부르는 상인(喪人)을 데리고 저에게 '좋은 가르침'을 행한다고 성언(聲言)했습니다. 저와 김한빈은 힘을 모아 땅을 파서, 사서(邪書)를 숨겨 놓게 했고 점점 흘러 들었습니다"라는 내용이 이어진다. 말미의 '점점 흘러들었습니다'는 천주교 믿음을 점차 갖게 되었다는 의미다.

인용문은 '이가'는 황사영, 사서는 성경을 일컫는다. 반면 샤를르 달레(Ch.Dallet)가 남긴 『한국천주교회사』는 '그는 내포(內浦) 지방 출신으로 천주교를 자유롭게 신봉하기 위하여 재산과 집안과 고향을 버리고 배론으로 가서 옹기를 만들어 생계를 이어 나갔다'라고 신앙을 위해 배론을 찾은 것으로 기술하였다.

『순조실록』에도 거의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다만 '상인' 대신 '상제'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죄인 김귀동은 옹점(甕店)을 제천의 주론산(舟論山) 중에 옮겨 거처하였는데, 김한빈이 한 이가(李哥)의 상제(喪制)를 데리고 오자, 힘을 합해 땅을 파서 숨도록 하고는 사서를 학습하였으니, 이른바 이가란 자는 바로 황사영이었습니다.'-<순조실록 1년 12월 26일자>

김귀동 옹기가마를 재현한 모습. 황사영 토굴은 그 옆에 위치한다.

황사영 토굴은 김귀동의 옹기가마 옆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배론신학당의 뒤뜰로, 산이 끝나는 곳이기도 하다. 일제 때 출간된 『朝鮮西敎史』는 1929년 배론을 답사한 원주본당 정규량 신부의 증언을 바탕으로 쓰여진 책이다.

이 책은 황사영 토굴에 대해 '구경(口徑)은 약 1m 반 양쪽을 돌로 쌓아올리고 다시 큰 돌로 천정을 꾸몄다. 당일은 매몰되어 있는 까닭에 굴속에 들어갈 수 없었다'라고 적었다. 정황상 토굴 앞에는 출입구를 은폐하기 위하여 옹기를 겹겹이 쌓아 옹기저장고로 위장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황사영이 체포되자 그도 관헌에 붙잡혔다. 그는 옥중에서 갖은 형벌과 고문을 받았으나 끝내 배교는 하지 않고 1802년 2월 2일 홍주감영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 충북대 사학과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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