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거운 해가 저문다. 학습연구년 결과물로 작성한 200여 쪽의 '문해력' 보고서, 그리고 젊은 교사들과 '학습공동체'에서 연주한 "플루존"에는 올해 산남동 카페에서 마신 커피가 젖어 있다. 그 덕에 혹한의 겨울이 오기 전까지 20대 대학생인 줄 알았다. 플라톤의 '국가론'에는 따뜻한 교육론이 녹아있다. 교육의 실제적인 목표는 의료인이나 법률가를 양성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도움이 필요 없는 인간에 있다. 교육을 제대로 받아야 할 대상은 아동이 아니라 나이 먹을수록 문해력이 떨어지는 성인이다. 섣부른 문자 지도는 지혜를 부패시킨다. '국가가 정의롭지 않다면, 인간 교육은 없다.' 루소는 '국가론'을 다시 쓴다. 그의 아바타 에밀의 성장 과정을 한 세대 동안 묘사하였다. 보편적 경험이 체계화된 지식을 학생에게 전달하는 것만을 유일한 교육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자연과 삶에서 배우는 자유를 제시하였다. 그의 교육에는 교과서가 없다. 학교는 가정이었고, 환경은 시골이었으며, 교사는 살아있는 교과서였다. 의도된 독서지도는 이성을 부패시킨다. '개인이 자유롭지 않다면, 평등한 사회는 없다.' 존 듀이는, 자신의 사상을 추종하는 1930년대의 진보주의 교육이 전통적인 보수 교육과 충돌하는 것을 보면서, 양자의 운동을 종합하려고 한다. 독일의 칸트가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로 인식론의 혁명을 일으켰듯이, 아동을 태양의 자리에 두고 교사와 교과서가 그 주위를 돌게 하였다. 그의 의도와 달리, 전통적 천동설을 여전히 추종하거나 행성은 기억하지 않은 채 태양만을 숭배하려고 하였다. '위대한 교사가 없다면, 아동 중심 교육은 구라다.' 교원 자격 획득은 물로 받은 세례다. "플루존" 협연은 불로 세례를 받는 회심(metanoia)의 절차다. 읽는 동안 마음의 동요가 일어나고, 함께 생각하는 동안 교육의 의미가 드러나며, 세 사상을 발효시키는 동안 예전의 방식으로 교육을 할 수는 없게 된다. 주어진 교육과정에는 학생에게 심어줄 비전이 생생하지 않으며, 던져진 지도서에는 교육의 의미에 대한 논쟁이 중지된 채 수업 기술만 담겨있다. 교육의 의미와 수업의 기술을 따로 배우는 것보다 인류 경험의 정수인 고전(古典)을 읽으면서 자신을 성찰하는 것이야말로 교사가 해야 할 우선적인 학습이라 믿었다. 애석하게도 논어 첫 구절에 나오는 배움의 의미를 "플루존"으로 이해할 만한 나이가 되었을 때는 가르칠 기력이 바닥났다. 황혼녘 밀레의 기도는 농부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예배당이나 불당을 찾지 않는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기도는 글을 쓰는 것이다. 지난 5년 동안에는 가르친 것만큼 글을 써왔다. 기력을 채우는 기도가 되었던 현재의 글은, 과거의 마음을 볼 수 있는 셀카가 된다. 찬란한 순간이 아쉽다면 사진을 찍어놓으면 된다. 소리와 움직임이 없어서 답답하다면 영상도 챙기면 된다. 글에는 사진과 영상으로 담을 수 없는 영혼이 찍혀있다. 사진처럼 찬란한 순간도 찍혀있고 영상처럼 생생한 움직임도 있다. 사진과 영상에 담을 수 없는 고독의 숲을 거닐려면 마음의 셀카가 더 필요하다. 들뜬 희망으로 채워진 사진이 아니라 차가운 절망의 기운이 도는 글이 회심의 기도가 된다. 기도가 역부족이면 미래 세대를 위해 고인(古人)이 남긴 셀카, 고전을 만나면 된다. 끝까지 읽어 준 사람들, 감상을 전달해 준 사람들, 고마움을 표시한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있어서 3년까지 끌어왔다. 더 쓰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그만 쓰라고 강요하는 사람도 있었다. 글을 쓰지 않은 적은 없다. 남에게 보여주지 않더라도 나를 위해 글을 써왔다. "3년 동안의 셀카를 멈추고 마지막 인사를 드립니다. 함께 했던 기억은 행복입니다."
재수생이 30%에 육박하는 올해 수능은 유난히도 춥지 않았다. 입학하면서부터 비대면 수업하느라 수학여행을 못 간 이들도 어김없이 수학능력시험은 봤다. 언젠가 초등학생이 이런 질문을 했었다. "수학능력시험이 무슨 뜻인지는 알겠는데, 수학여행은 수학과 상관이 없지 않나요·" 김광석의 솔로곡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가 아날로그 테이프에 녹음된 것은 1992년이다. 정인은 14년 후에 자신의 디지털 음원과 합성한다. 김광석과 음역대도 달랐고 음색은 얼핏 보기에도 조화롭지 않았다. 동시에 부르는 느낌을 갖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해야만 했다. 리코더 이중주와 달리 목소리 듀엣은 학생에게 쉬운 일이 아니다. 동요의 아랫성부와 윗성부를 따로 부른 후 합성하면, CG를 활용한 영화처럼 멋진 듀엣이 될 수 있지만, 그것은 수학(修學)이 아니다. 통상적으로 연주되는 학력과 인성의 이중주는 비동시적 합성 연주였다. 교육학 문외한들이 객관적 상대평가 능력만을 학력이라고 규정할 때, 인성(人性)이 처박혀 있던 쓰레기통에는 미래학력도 함께 있었다. 누구도 학력과 인성을 비동시적으로 교육하자고 주장하지 않았지만, 학력이 논란이 될 때는 인성이 없었고 인성을 강화할 때는 학력이 없었다. 공교육 정상화가 선행교육 금지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낄 때는 좌우 눈치를 본 뒤에 인성교육이나 독서교육을 학교의 대표 브랜드로 내세운다. 인성과 학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알지도 못하고 잡을 능력도 없으면서 동시에 잡겠다고 큰소리를 친다. 인성과 학력이 한 마리 토끼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교육을 시작할 때부터 인성과 학력이 정합적으로 설계되어야 실천할 수 있다. 학력은 학원과 과외에 맡기고 인성은 서원과 사원에 맡기려고 한다면, 그리고 학교가 하는 일은 내신과 생기부 관리밖에 없다면, 학교는 교육기관이 아니라 차라리 인증기관이라고 불러야 한다. 청어람의 순자는, 배움의 시작이 지식의 암송과 독서에서 시작하고 배움의 끝은 예(禮)를 존중하는 것에 있다고 하였다. 교과를 진보적으로 구성하였던 시카고의 프래그머티스트는, 학생 경험의 성장을 통하여 사회 진보를 기대하였다. 학력이 지식의 축적이 아니듯이, 인성은 개인의 수양이 아니다. 학력과 인성의 동시적 연주는 사회적 시민 활동과 연결될 때 자연스러워진다. 학생과 교사도 시민이다. 유초중고 14년의 배움 중에 시민사회에 가지고 갈 경험이 많으면 좋으련만. 삶과 배움이 유리될수록 기말고사와 수능이 끝난 시점에는 해방감과 함께 허탈감도 찾아온다.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는 차량의 네비게이션이 갑자기 목적지를 알려주지 않고 있다. 학생만큼 교사도 방황한다. 교사의 일터도 사회의 축소판이 아니라 고귀한 섬이다. 교사의 학력은 세계를 수동적으로 이해하는 능력이었고 환경을 능동적으로 변형하는 역량이 아니었다. 교사의 인성은 집단과의 조화에만 초점이 모아져 있고 집단의 가치를 의심하는 용기를 교육학 교수들로부터 배우지 못했다. 교사의 옷은 여름일지라도 가볍지 않다. 안쪽은 위선(僞善)의 옷감, 겉은 무용(無用)의 옷감으로 되어 있다. 학교가 추구해야 할 본연의 수학(修學)이 부재하면 쪽팔린 것을 알기 때문에, 두 마리를 사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한다. 실상은 얼마나 무기력했던가! 그나마 잡으려고 했던 학력의 토끼도 제대로 뛰지 못하고 절뚝거린다. 십 년 전의 혁신학교에도 두 마리의 토끼가 뛰어다녔다. 경기도와 대구에서는 IB 학교로 두 마리를 잡겠다고 한다. 학교의 자율과 교육청의 장학, 아동의 흥미와 교과의 형식이 대립적이지 않고 조직 내의 업무가 협력적이기를 기대해본다. 그렇지 않으면 행복해야 할 14년의 무대는 여전히 활기 없는 뒷골목이다.
장관이 없는 교육부는 6월과 10월에, 미래를 지향하는 우리 교육청은 7월에 백년대계의 학력 대책을 내놓았다. 교육부는 '맞춤형 학업성취도 자율평가'를 내후년부터 초등 3학년까지, 우리 교육청은 '에듀테크 기반 다차원 평가'를 내년부터 초등학교 1학년까지 확대한다. 대통령의 '자율적 전수평가' 발언은 강원과 부산의 학생들의 '필수 참여' 지시로 이어졌다. 자율성은 시작부터 타율성이 되었고, 일차원의 몸에 다차원의 옷이 입혔다. 우리는 획일성을 창의성이라 부르고, 평가 대책을 학력 대책이라 부르는 시대에 살고 있다. 평가 예찬론자들은 학교를 위한 복음을 선포할 때마다 세 가지 율법 조항을 낭독한다. 첫째, 국가와 교육청이 일제식 평가를 주도하지 않으면 학교는 평가하지 않는다. 둘째, 일제식 전수평가만이 교사에게 학생의 실력을 파악하는 자료를 준다. 셋째, 종합 지원 대책이 있기 전에는 맞춤형 평가와 참여형 수업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율적 다차원평가만이 모내기 철에 저수지를 채우는 단비가 된다고 믿고 있다. 이명박 정부의 이주호 장관이 재림하면 구원의 메시지는 완성된다. 학력은 '평가'가 아니라 '수업'을 통하여 성장한다. 평가를 학력이라고 부르는 것이 '위로부터의 지록위마'라면, 평가를 수업이라고 부르는 '아래로부터의 지록위마'가 있다. '과정평가'의 관점으로 수업을 바라본 지 10년이 되어간다. 평가의 관점이 없으면 학력처럼 수업도 설명하지 못한다. 교육학 용어로 보이는 과정평가는 정책용어에 가깝다. 과정평가의 전도사들은 수업의 의미가 상식적으로 정해져 있는 '아무 말 교육 잔치'에 나타나 피드백(feedback)의 MSG와 맞춤형의 감초를 뿌린다. 맛나게 먹고 멋진 똥을 싼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참여형 학습활동과 맞춤형 교수활동이 펼쳐지는 희랍의 변증술과 유대의 하브루타를 두고 평가라는 단어를 먼저 떠올리는 석학은 없었다. 평가를 통하여 성장한다는 논리는 교사도 위협한다. 성과급을 놓고 벌이는 동료끼리의 다면평가가 교사를 성장시킨다고 선전한다. 서로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과정을 평가할 수 없고, 부당한 기준들이 갑자기 등장하기 때문에 결과에 승복할 수가 없다. 인정할 수 없는 평가를 받았으면서도 학교를 공동체라고 부른다. 학생 과정평가의 불협화음이 교사 다면평가 소음을 증폭시키면서 교사의 양심에 어둠이 드리워진다. 동료의 성장 과정을 평가하지 못하는 교사가, 학생의 잠재력을 온전히 평가하여 미래 역량을 키워내는 길에 위태롭게 서 있다. 평가 중심의 교육은 연말이 다가올 때 학생과 교사로부터 배움의 열정을 빼앗는다. 초등학교 6학년도 이때가 되면 수능을 치른 고3처럼 행동하려고 한다. 가로수의 나뭇잎이 남아 있지 않을 즈음 학생은 교과서를 버릴 준비를 하고 교사는 다면평가를 준비한다. 진단평가의 불꽃은 장미가 피기 전에 사라졌고 과정평가의 온기는 생기부의 차가운 글자로 변형되었다. 가르치고 배우는 열정의 나뭇잎도 남지 않는다. 차마 겨울방학까지 기다릴 수 없어 봄날까지 배움의 동면에 들어선다. 특별히 강원, 부산, 충북의 평가 정책은 다른 시도와 차별을 두고 있지만 수업 지원 대책에서는 차별성이 없다. 학생과 함께 하는 교육은 평가 대책만을 던져놓고 저 멀리서 학생을 기다리지 않는다. 정치의 왕도를 여민동락에서 찾은 맹자는, 은나라 마지막 임금 주(紂)를 도적으로 봤다. 교육의 왕도를 학생과 함께 하는 것에서 찾은 듀이(Dewey)는, 교과를 진보적으로 조직하는 수업 아이디어를 주장할 수 있었다. 평가의 관점이 아니라 수업의 관점에서 다중지원팀을 형식적인 조직으로 구성하지 않아야 두드림 학교가 살아 움직인다. 그래야 오래된 미래의 길이 보인다.
가수 유미리가 갖고 있는 '젊음의 노트'에는 꿈과 사랑이 아직 채워지지 않았다. 어린 사람은 그 꿈을 사랑했고, 젊음이 지난 사람은 소리 없이 흔들리는 노스탤지어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가수 김광석의 노래가 그랬다. 이등병의 편지가 60대 노부부의 이야기로 이어지던 서른 즈음에 사랑하는 딸을 두고 떠나버렸다. 가을하늘에 나도 편지를 쓴다. 대학 다닐 스물 즈음에는 '당신도 울고 있네요'와 '사랑했지만'을 자주 불렀다. 대답 없는 사람을 멀리서 바라보는 것이 사랑인 줄 알았다.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를 이어서 부르면 어제 내린 빗물이 어머님의 눈물과 구별되지 않았다. 파란 하늘에 그려본 이름 모를 선녀가 '교대인이여 깨어나라'라고 외친 서초동 남태현 열사로 변했다. 살아 있음은 축복이었다. 내 나이 마흔 즈음에는 어린이집에 다니는 둘째에게 '서른 즈음에'를 가르쳐 주었다. 아빠 말을 잘 듣던 귀염둥이는 추석 명절에 모인 친척들 앞에서 감정을 잡고 불렀다. 밤하늘에 보름달이 뜨고 갈바람이 천천히 불어오면, 점점 멀어지는 기억을 붙들지 못하고 있는 나만이 세상에 홀로 있었다. 청춘은 머물러 있지 않았다. 혁신학교 졸업식을 준비할 때는 항상 주제곡을 선정하고 그 분위기에 취해 행사를 진행했었다. 내 나이 쉰 즈음에는'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를 선정하였다. 특히 가수 정인과 함께 부른 것처럼 편집된 노래가 맘에 들었다. 졸업식장은 학생들을 축하하는 가족들로 꽉 찼고 담임 교사의 마음은 텅 비어갔다. 애증의 일 년이 추억으로 묻힌 교실에 남아 어둠이 내릴 때까지 들었다. 애절한 두 남녀의 목소리가 잊어야 할 것과 기억해야 할 것을 구별하지 못하는 마음을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그는 먼지가 흩날리는 흐린 가을 거리에 항상 홀로 서 있다. 바람이 불어오는 곳, 햇살이 눈부신 곳에서 봄날에 만난 사람이 보인다. 훈련소로 나설 때 풀 한 포기에도 꿈을 주었던 스무 살의 온기가 가득한 사람이다. 통기타를 메고 하모니카 전주가 거리에 퍼지면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걸어오고 있다. 터질 듯한 울음을 꽉 물고 있다가 또렷한 발음으로 천천히 노래를 씹어 부른다. 노래는 가을 빗소리에 묻힌다." "행복했던 그 날들이 있었다. 너의 생각만으로, 너의 음성만으로, 너를 사랑하는 것만으로 기뻤던 날들이 있었다. 빗속에서 그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다. 낙엽이 어둠처럼 쌓이고 차가운 바람이 꿈결처럼 스칠 때 그의 모습도 사라진다. 그 사람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기뻤던 날들이 사라졌다. 사랑은 아픔이 되었고 잊혀지지 않는다." "그 사람을 보내고 술잔 앞에 앉았다. 못다 한 말들이 술잔에 떨어진다. 창틈으로 보이는 별빛은 점점 늘어간다. 빈방의 창문으로 새벽이 올 때까지 그의 이름을 부르면 밤하늘의 수많은 별이 그의 가슴에 내려왔다. 비가 그쳤다. 바하의 선율에 따라 먼지가 되어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향해 날아간다. 스물 즈음에 시작된 젊음의 꿈이 멀어지고 서른 즈음에는 모든 것이 잊혀져 가는데 너무 아픈 사랑은 잊혀지지 않는다." 희망을 말하는 찬송가나 곡조 변화가 없는 찬불가는 이 세상에 굴러다니는 마음을 직접 위로하지 않는다. 그의 한 소절은 위로가 된다. 그러나 그의 전체를 옮겨놓은 후 낭독하면 어두운 바다에 빠진다. 심해 속으로 내려가는 잭(디카프리오)의 모습을 셀린 디온처럼 아름답게 부르지 않는다. 잭이 그려준 그림을 올려받고서 보석을 내려보내는 로즈(윈슬렛)의 마음이 보이지 않는다. 이젠 김광석의 노래를 부르지도 듣지도 말아야 할 때가 되었다. 꼭 들어야 한다면 가사는 음미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스스로 힘으로 한결같은 마음을 유지하려면 그렇게 해야 한다.
전교조 아웃을 외친 교육감의 제1호 사업은 기초학력 진단평가 개선이다. 윤석열 정부 출범 100일째 되는 날, 전교조 충북지부가 그 사업의 성격을 공론화하였다. 학력 신장의 외나무다리에서 두 진영 중 한쪽은 아웃 될 판이다. 진단평가에 대한 교사의 부정 인식은, 대통령 국정평가에 대한 국민의 부정 인식보다 높다. MBC에 따르면, 교육청은 ㉠평가의 부작용을 최소화할 것이고 ㉡지필평가 외에 교사의 관찰도 반영하므로 학교별 집계는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부작용의 '최소화'가 아니라, 부작용 자체가 없어야 한다. 전통적 평가는 부작용 최소화를 공언하면서 '아동의 다면적(many-sided) 흥미를 고려하지 않는 교수 활동'을 유도하였다. 무엇보다 개헌정족수를 넘는 비율이 반대한다는 것 자체가 부작용이다. 7월 2일에 하달된 제1호 공약을 다시 봤다. '㉡'은 공문 내용과 달랐다. 내년의 방식이 아니라 현재의 방식이다. 시스템에 저장된 지필평가 자료와 교사의 관찰을 별도로 관리하면, 학교별 집계를 할 수도 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공문은 명령하는 글이지 공감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도표 속에 복잡한 행정 사항이 채워지고, 온갖 교육 용어로 치장된 문장들이 서로 단절된 채 나열된다. 그래서 어떻게 문제은행으로 과정평가와 비인지적 평가를 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교사 존중의 풍토가 가능한지 알려면, 공문을 볼 것이 아니라 좌선을 하는 것이 낫다. 교육청은 ㉢평가 날짜를 학교별로 정하므로 서열화는 없다고, ㉣패드로 평가하므로 업무부담은 없다고, 그리고 ㉤3월과 12월의 결과를 오직 학생 지도에만 활용하겠다고 한다. 3월과 12월의 격차 때문에 장학사가 학교에 오지 않아도 보이지 않는 손은 죽지 않는다. 평가 날짜가 달라도 '한' 내용을 '한' 시스템으로 한다면, 언제든지 지역별 및 학교별 서열화가 가능하고, 누군가는 미도달 학생 수에 대한 자료를 볼 수 있다. 지금 제작되고 있는 동영상 콘티(Conti)에 따르면, 교사는 자신의 힘으로 생산할 수 없는 자료를 시스템으로 받게 되어 감격의 눈물을 흘릴 예정이다. 학생 지도는 장학사가 아니라 교사의 몫이다. 시스템이 필요한 이유로 제시된 '초중등 12년 학습 이력 관리'가 흥미롭다. 6학년 담임을 하는 동안 다른 교사들이 5년 동안 정성스럽게 작성한 생활기록부를 보며 학생을 파악하였고, 부족한 부분은 상담을 통하여 보강하였다. 그리고 3월의 자율 진단으로 주도성 성장의 기초를 다졌다. 학생과의 피드백을 위해 AI가 제공하는 문제은행을 요청하지 않는다. 고등학교 3학년 담임이 초등학교나 중학교 진단평가 내용을 참고하면, 참고하지 않을 때보다 학생을 더 잘 이해한다는 말은 들어보지도 못했다. 그래도 의문이 남는다. 교육계에 몸은 담갔으나 교실에는 발가락만 담근 사람이, 담임 경력이 짧은 사람과 협의하여 만든 아이디어라서· 인공지능과 결합했다는 소문만으로도 학교 밖에 있는 사람들이 지지할 거라 믿어서· 평교사의 노고를 진두지휘하는 모습을 교육계의 인천상륙작전처럼 연출하면, 충북도민이 2026년에도 영웅으로 기억해줄 거라서· 이젠 2학기가 시작되었다. 9월 1일부터 교육청 내의 진보적 인사는 모두 아웃 될 거라는 기사를 읽었다. 교육청 밖에 있는 전교조와의 외나무다리 혈투가 길어질 형세다. 교육부총리가 고시하는 국가교육계획서는 2022년에도 6개의 핵심역량을 그대로 강조할 예정이다. 그중에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어도 부족함이 없는 능력이 '의사소통 역량'이다. 고독한 결정의 칼을 휘두르는 자리에 있을수록 이념이 다른 세력과도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가장 의사소통 역량이 뛰어난 교육계의 인물을 일러 교육감이라 한다.
이명박 대통령이 교육감이 된 듯하다. 교육계에 항상 내재되어 있던 정치적 쇼가 10년이 지나니 부활하였다. 10년 주기의 교육의 강산은 평가만능주의로 새 단장을 하고 나타나 신규 교사에게도 신비한 체험을 준다. 부산의 하윤수 교육감도 충북처럼 3선에 도전한 후보를 이기고 당선되었다. 그도 혁신학교를 폐지하고 기초학력을 강조하면서 평가 학년과 대상을 확대한다고 하였다. '前 교육감 재직 동안 학력 평가가 이뤄지지 않아 학생들의 성적이 하향 평준화됐기 때문에 제대로 된 평가체계를 구축해 이를 시급히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정말로 평가가 학력을 향상시키는가? 교육청 차원에서 일제고사를 해야만, 그 덕에 학생 수준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정도로 교사는 무능한가? 충북 교육청은 부산 교육청을 앞질러 당장 내년부터 초등 1학년도 평가 대상으로 삼는다고 한다. 도내 모든 학생이 3월과 12월에 두 번이나 평가하겠다는 아이디어는 MB도 생각하지 못한 놀라운 정책이다. 이 정책이 실현되면 혁신학교 축소를 위해 시끄럽게 할 필요도 없다. 학교 밖에서 강요된 평가가, 학교 내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고 있는 수업 혁신의 씨앗을 골라낼 것이므로, 손대지 않고 코를 풀 수 있다. 코로나 사태가 고등학교 내신 시험과 모의고사 횟수를 축소시켰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시험 횟수가 문제가 아니라 교사와 학생 사이의 수업의 밀도가 더 큰 문제인데도 교육청은 평가를 고집한다. 교사에게 학력에 대한 책임을 묻거나 학교 및 학교장을 평가할 때 말고는 쓸 데가 없는 빅데이터를 구축하여서 어디에 쓰려고 하는 것인가! 초등의 모든 학년이 학업성취도 평가를 일 년에 두 번이나 본다는 것은, 공교육 정상화를 지탱하는 내신 제도를 무너뜨리고 오직 수능으로만 학력을 평가하는 것과 같다. 학교는 이제 학원과 경쟁해야 한다. 3월을 위해서 학원가에서는 겨울방학 때 열강을 할 것이고, 12월을 위해서 학교에서는 비교당하는 굴욕을 맛보지 않으려고 비장해질 것이다. 최소한 3월의 기초학력 미도달자 비율보다 12월의 비율이 훨씬 더 낮도록 사력을 다해야 한다. 10월부터 학생중심의 역량강화 활동은 횟수가 줄어들어야 한다. 학교로 찾아오는 외부 강사의 수업도 1학기에 집중시키려 할 것이고, 할 수만 있다면 다른 학년에게 떠밀 것이다. 운동회와 학습발표회는 코로나와 상관없이 규모를 줄이고 학년 혹은 학급 자체 행사로 바뀔 것이다. 학력과 평가를 경시하는 교사는 없다. 기초학력이 부족하다면 어떤 역량도 발휘될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결과를 중시하는 정치인들처럼, 넓은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는 학력과 지식의 개념 중에서 낮은 차원의 것들만 끌어모아 가르치는 것은, 미래 사회의 교육도 아니고 현자의 교육도 아니다. 학력과 평가의 개념을 새롭게 구성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평가만능주의자들은 학교와 학원을 경쟁시켜서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주장하려 한다. 학원이 학교를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학교로 하여금 학원을 도와주게 하려 한다. 4차 산업시대에도 문해력(literacy) 향상을 위한 독서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가? 미래는 예측할 수 없는 시대이니 20년 후를 대비하려면 "자신이 처한 상황과 위치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고 변하지 않는 진리를 품고 있는" 동서양의 고전을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는가? 그렇다면 예수의 복음서, 공자의 논어, 플라톤의 국가론 중에서 어느 구절로 지금의 평가만능주의를 정당화할 수 있는가? 교육 정책의 정당화가 교육학 이론이나 교육 사상가에 있지 않고, 단순히 상식적이고 정치적 판단에 의해 이루어질수록, 교육 관련 자격증을 비웃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날 것이다.
1988년 '사랑과 평화'가 "울고 싶어라"를 내놓았다. 떠나보면 알 거라고, 아마 알 거라고, 울지 않으며 불렀다. 헌법재판소가, 교육에 대한 사색을 멈추고 교육학적 지식을 암기해야 교사가 될 수 있다고 판결할 때도 이 노래를 불렀다. 이달 6월, 이 노래를 다시 부른다. 당신은 친정을 떠나 시댁에서, 학교를 혁신하려 했고, 중식을 무상급식 했으며, 학생에게 인권 의식을 심어주려 했다. 참교육의 이념이 아니라, 10월의 홍익 이념을 '5월의 어린이와 11월의 학생'에게 확장하려 했다고 말했다면, 시댁이 학생인권을 반대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중식은 물론이고 조식까지 주겠다고 말했다면, 시댁이 당신을 환영했을지도 모른다. 수업 혁신이 제자리인 상황에서, 교사의 자율성이 학생의 주도성으로 전이되는 비용만큼은 의결해달라고 말했더라면, 당신의 이념에 감염될 시댁 식구가 더 늘었을지도 모른다. 당신만큼 비정규직과도 소통하려 노력한 사람은 前 시대에도, 同 시대에도 없었다. 평생의 소신과 이념을 변치 않는 비전으로 꾸준히 제시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코로나 돌봄 문제로 교사와 공무직이 충돌할 때 당신은 모두의 교육감이 되고자 했다. 그래서 양쪽으로부터 욕을 먹어야 했다. 고교학점제를 수도권보다 의욕적으로 추진할 때는, 시댁은 물론이고 친정의 비판도 받아야 했다. 혁신학교의 밝은 면을 먼저 본 학부모들만이 당신 편이 되어 주었다. 시댁 사람들은, 선출된 사람 중에 코드인사를 하는 사람은 오직 노무현과 당신뿐인 것처럼 말한다. 조선 시대에도 형편이 좀 넉넉하면 한두 명의 친정 식구를 데리고 와도 욕하지 않았는데, 참으로 몰인정한 세상이다. 그러고 보니 당신은 노무현을 닮았다. 참여정부가 미국과의 FTA를 체결하려 할 때 모든 세력이 FTA를 반대하고 노무현을 찍은 손을 미워했었다. 세상 물정을 모르는 사람도 광기에 젖어 집단행동을 했었다. 미국의 트럼프가 아니었다면 그의 고독한 선택이 현명했다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다. 고교학점제에 대한 당신의 선택도 그럴 것이다. 방송토론에서 온정적인 품성이 미래 시대에도 가장 핵심적인 역량이라고 힘주어 말했지만, 경제학자 제임스 뷰캐넌의 공공선택론을 윤리교육에 적용한 시아버지는 헛소리로 여겼다. 그는 학생의 본성도 이기적이라 전제할 때 윤리적 원칙에 따라 교육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의 도덕교육론은 중용의 성(誠)과 불교의 자리이타(自利利他)를 기초로 구성된 도덕 교육과정과 결이 다르다. 이젠 행복 씨앗의 웃음과 미래 학력의 질문이, 교실에서 사라지는 모습을, 청사 밖에서 봐야 한다. 이젠 철학도 빈곤해진다. 시골 수탉을 주작이라고 우기는 것처럼, 그 흔한 구호 한두 개를 두고 교육철학이라고 믿는다. 초등 교과서에도 나오는 '지속 가능한 미래'의 구호만을 되새김질한다. 플라톤, 루소, 듀이로부터 교육의 본질을 탐구하지 않고 도구화된 교육의 기능에만 충실한 학력지상주의가 되려한다. 이제부터는 MB 때처럼 통계 숫자 올리는 데만 온 힘을 쓰면 된다. 당신이 떠나면, 서울의 조전혁과 함께 "反지성교육 OUT, 反자유교육 OUT, 전교조 OUT"의 슬로건을 내건 분이 우리의 교육감이 된다. 곧 기초학력 미달자가 전국 최저가 되고 2025년에는 대치동보다 수능 수학 1등급 비율이 높을 것이다. 놀랍게도 2042년부터는 충북 영재고 출신의 노벨수상자가 배출되고, 지성과 자유가 교육계에 물결칠 것이다. 요한 보스코가 8년 머문 청사를 떠나는 날, 뒷모습이 내 눈에서 사라질 때까지, 찬송가 323장을 울지 않으며 부르겠다.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경복궁 향원정을 배경으로 앉아 있는 아버지가, 큰형 환갑 때 뭔가 해주길 바라는 눈치다. 작은형과 동생에게 그 뜻을 전했다. 잠시 백수 중인 작은형이 기대 이상의 돈을 냈다. 여행상품권도 마련하고, 랍스터와 킹크랩을 터지도록 먹기로 했다.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들려줄 손편지를 나에게 맡기셨다. "아버지로서 아들에게 해줄 법한 내용을 떠올려 보면 되잖아. 너도 두 아들을 키웠으니, 4형제를 키운 내 마음을 다른 놈보다는 더 짐작할 수 있지 않냐? 쓰고나서 직접 검사받을 필요도 없다. 네가 낭독할 때 누군가 눈물 한 방울이라도 흘리면 합격이다." 교사로 생활하면서 학생에게 이렇게 어려운 숙제를 낸 적이 있었던가? 서울 중계동에 도착했다. 예약한 자리에 붙일 현수막은 큰형의 아들, 하석이가 일찌감치 마련했다. 케이크는 큰형의 큰딸, 은선이가 준비하기로 했다. 꽃은 아무도 준비하지 않는 모양이다. 카카오맵으로 근처 꽃집을 찾았다. 친형의 환갑에 줄 꽃이라고 주문하니 맞춤형으로 잘해주었다. 리본 띠에 인쇄할 문구를 불러달라고 해서 "사랑하는 큰아들아!"라고 말했다. 내 얼굴을 다시 보던 여주인의 얼굴이 갸우뚱거렸다. 작은아버지가 1분 동안 개식사를 하고, 하석이는 현수막의 글귀를 읽어나갔다. 방문이 열리고 은선이가 멋진 케이크에 초 여섯 개의 불을 밝힌 채 들어왔다. 자연스럽게 생일 노래가 불리었다. 촛불이 계속 끄먹거리고 있을 때 동생이 상품권을 전달했다. 이젠 내 차례다. 큰형에게 들려줄 편지를 가지고 왔다고 말했다. 제수씨가 들국화의 '걱정하지 말아요, 그대' 음악을 틀었다. "오늘 이 자리에 누가 왔는가? 모두 반가운 얼굴이구나! 은선이의 재롱을 차마 다 보지 못하고, 하석이가 어미 배 속에서 나를 배웅할 때, 난희가 무거운 배를 안고 올랐던 대룡산 근처 비탈길을 내 어찌 잊을까! 모두 보고 싶었고, 음(陰)으로나마 너희를 돕고 싶었다." 여기까지는 부드럽게 읽어나갔다. 다음부터가 고비다. "우인아, 내 큰아들 우인아! " 큰형 이름을 부르고 나서 다음 문장을 읽어야 하는데 숨을 고르지 않고 읽었다가는 눈물 한 방울이 나올 것 같았다. 오직 이 한 문장을 읽어주기 위함이었는데 내가 감정에 휩싸이면 불합격이다. 몇 초인지 모를 시간 동안 들국화의 노래만이 이 조용한 공간에 퍼졌다. '그래, 아무 걱정하지 말고 읽어라, 성우야!' "고맙다. 나보다 오래 살아줘서 정말 고맙다. 그래서 내 환갑보다 더 기쁘다." 형의 환갑이지만 아버지는 형수에게 하고 싶은 말도 빼놓지 않았다. "난희야, 내 큰 아가야! 사돈어른이 네게 올려준 생일상보다 네가 올려준 제삿밥이 더 많았구나. 내 주위 인간들이 어찌나 부러워하는지 흠향하기 부끄러웠다." 여기까지 읽고 나니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나머지 부분부터는 목소리가 커지고 속도가 빨라졌다. 다음날에 영상을 보고 안 사실이지만, 결정적인 두 단어를 잘못 읽어서 더 부끄러웠다. 동생 딸, 여섯 살 은비가 들고 있는 꽃다발 안에 편지를 넣었다. 웃으며 조카를 맞이하던 큰형의 얼굴색이 갑자기 붉어졌다. 리본 글 탓일까? 모두 다시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고, 큰형은 막내 조카와 함께 끄먹거리는 불을 껐다. 모든 긴장이 사라졌다. 랍스터와 킹크랩으로 채우지 않아도 배가 불렀다. 평소 주량의 반도 못 채웠다. 식당을 나오며 큰형과 작은형이 자기 집으로 가자고 했지만, 심야버스를 타고라도 청주로 가고 싶었다. 작은형이 남부터미널까지 배웅해주고 웃으며 한 말이다. "야, 너 때문에 처음으로 술을 먹지도 않고 울었잖아!" 새벽에 도착하였다. 빨리 잠을 청했다. 환갑 전, 검은 미소의 '향원정 사진' 속에만 계시는 아버지가 말씀하신다. '합격'이라고.
노예제에 대해 침묵했다면 머스킷 총에 쓰러진 게티즈버그 청년은 없었을 것이다. 토지제와 신분제에 대해 침묵했다면 개틀링 기관총에 쓰러진 우금치 농민은 없었을 것이다. 거대한 역사의 바다에는 차전놀이의 두 동채가 일정한 시기마다 맞붙는다. 경제와 인권의 차전놀이 한판 앞에서 게티즈버그에서는 진보의 동채가 이겼고, 우금치에서는 보수의 동채가 이겼다. 홉스가 옳다면, 루소는 틀리다. 맹자가 옳다면, 순자는 틀리다. 그 사잇길은 없다. 학력에 승부를 건 이명박 정권 시절, 진보 교육감이 대거 당선됐다. 최고의 스타 김상곤 교육감은 무상급식, 학생인권, 혁신학교 등으로 진보 교육의 기준을 제시했다. 이명박의 교육부 장관 이주호는 보수진영의 학력 기준을 제시했다. 당시 충북의 교육감과 교총은 정권의 일제고사 정책을 수행하면서 창의력과 도덕성을 방치하고 암기력 향상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충북은 고요했다. 수도권은 고요하지 않았다. 곽노현 교육감이 그 직을 상실하기 1년 전, 오세훈 시장이 곽노현 교육감과 무상급식 문제로 마찰을 일으키고 직에서 물러나자, 한나라당 대표 홍준표는 시장 후보였던 나경원 의원과 함께 보수 교육단체 한국교총 본부를 찾아간다. 교총 회장은 사랑채에서 버선발로 대문까지 마중을 나왔다. 첫 방문지가 보수 교육단체였던 경우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어 곽노현이 쫓겨난 자리를 두고 이수호 위원장과 동채싸움을 하던 문용린 후보는 "정치에는 보수와 진보가 있지만, 교육은 보수와 진보가 없다"라고 했다. 그러나 이때만큼 정치와 교육이 하나가 된 적이 없었다. 박근혜 정부 때에는 역사 교과서 국정화 논란이 있었다. 당시 교총은 학교 분회장급 위치에 있는 간부들을 중심으로 설문조사 한 후에 정부 여당을 지지하는 선언을 했다. 문재인 정부에 와서는 자사고 폐지 문제로 교총과 전교조가 차전놀이를 했다. 21세기 들어 추돌한 굵직한 동채 사건만 해도 일곱 가지가 넘는다. 그런데도 교육에 진보와 보수가 없다고? 여물 씹던 소의 내장이 터질 소리다. 올해 6월 교육감 선거 승리를 위해 보수진영이 '수도권 교육감 후보단일화 추진협의회(교추협)'를 작년에 결성하더니 단일 후보로 조전혁을 결정했다. 그는 한나라당 국회의원 시절 전교조 명단을 공개해 배상금 퍼포먼스로 유명세를 치르다가 최근에 재기한 오세훈 시장에 의해 혁신공정교육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됐다. 전교조에 대항한 용기와 소신이 자산이 되어 가장 유력한 보수 후보자가 되었다. 무상급식과 전교조와의 투쟁으로 쓰러진 두 사람이 시장과 교육감으로 다시 만난다면, 10년 전 나경원과 문용린의 꿈이 이루어진다. 교추협에는 유명 인사가 셋이다. 한국열린교육협의회 이사장과 민사고 교장을 했던 이돈희, 다중 지능 이론으로 인기를 누리다가 이돈희와 함께 김대중 정부의 교육부 장관을 지냈던 문용린, 그리고 MB의 교육 수장이었던 이주호 경제학 박사 등이다. 한때 좌파 정부의 교육 수장이었던 두 사람이 보수 정권의 교육 수장과 손을 잡고 좌파 교육에 대항하는 얼굴마담이 됐다. 이돈희 장관이 최근에는 미국 진보주의 교육의 상징인 존 듀이를 연구한 책을 출간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행복 교육의 전도사가 되고자 했던 문용린의 다중지능은 그가 지지한 자사고보다는 그가 지지하지 않은 혁신학교에서 더 연구할 가치가 있었다. 이주호는 교추협의 결정을 무시하고 자신이 후보로 나서더니 이제야 창의력과 인성 교육에 집중한다고 말한다. 보수교육과 진보교육에는 여러 사잇길이 분명히 있어도 정치와 교육의 사잇길은 없다. 상대방을 이념 편향적이라고 비판하면서 그들 자신은 이념 편향적이라는 사실을 숨기려면, 하늘보다 더 넓은 손바닥을 들고 있어야 한다.
청주 MBC에는 학력저하 전문기자가 있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석 달 전 배포한 자료에 기초하여, MBC가 이틀 동안 3꼭지로 논란의 불을 지피자 충북교총도 목소리를 높였다. "교육감은 학력저하에 대한 무한 책임을 가지고 학력제고를 충북교육 정책의 최우선 과제로 선정하여 추진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 안타깝게도 2021학년도 수능에서 충북의 1등급 비율이 전국 최하위권이었고 표준점수 평균도 최근 10년 중 최저였다. 수학 '가' 1등급 비율은 0.8%였다. 수능 점수나 서울대 합격률만으로 학력을 재는 시대는 지났다는 주장, 그리고 '과거 학력' 개념으로는 '미래 학력'을 육성할 수 없다는 소리는 통계의 힘에 눌렸다. 대신에 교육감에게 모든 책임을 지우려는 충북교총과 교육감 예비후보자들의 기세는 커졌다. 청주 MBC 뉴스를 더 검색해 보았다. 2015년 11월 16일에는 현재와 흡사한 보도 구린내가 난다. "지난 2012년 이후 꾸준히 상승세를 보이던 주요 대학 진학률이 올들어 갑자기 뚝 떨어진 겁니다. 공교롭게 진보 교육감 취임 이후 학력이 떨어지며 논란에 불을 지피고 있습니다." 기이하게도 뚝 떨어진 바로 그해는 수학 '가' 1등급 비율이 역대 최대인 4.8%였고 평균 점수도 3위나 되었다. 무엇이 공교로운가? 진보 교육감이 취임하자마자 갑자기 학력이 떨어졌고 8년째 되는 해에도 학력이 떨어졌다고 주장하고 싶은가? 2014학년도에는 68명 합격했고 진보 교육감이 당선된 해(2015학년도)의 고3이 65명 합격했다면, 서울대 합격생 하락은 2014년 보수 교육감 말기부터라고 봐야 한다. 무엇보다 2013학년도에는 90명이 넘었는데 2014년에 68명밖에 못 간 이유를 가지고 문제 삼았어야 했었다. 학생의 학력은 교육감의 정치적 성향이나 능력과는 무관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략 2013년부터는 두 가지 변수를 생각해야 한다. 그 하나는 이명박 정부가 자사고를 지정하면서 충북의 초중 인재들이 졸업 후에 타시도로 진학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또 다른 하나는 서울대보다는 의대를 선호하는 경향이 늘고 있다는 점이다. 보다 못한 경기과고도 2018학년도 신입생부터 의대를 지원하면 장학금을 회수하기로 결정하였다. 청주에는 역량 저하를 걱정하는 기자도 있다. "공교롭게도 진보 교육감이 혁신학교 운동을 펼쳤던 2016학년도부터 서울대 합격 비율이 전국 최하위였던 2020학년도까지는 서울대 합격자가 60명 미만이었습니다. 코로나로 힘들었던 2021학년도에는 수능 성적이 전국 최하위권이었습니다. 확실히 숫자로만 확인되는 학력은 저하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해에 71명이 서울대에 합격했고 2022학년도에는 75명이나 합격했습니다. 보수 교육감 말기보다 높은 수치입니다. 교육계는 이제야 충북형 미래학력이 구현되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의료계, 과학계, 교육계의 진학률이 증가하고 서울 소재 주요 10개 대학의 합격생도 늘어나고 있는 가운데 2023학년도에는 어떤 결과를 낼지 귀추가 주목됩니다." 학부모 인터뷰도 있었다. "2022학년도에 서울대 합격을 배출한 고교가 역대 최대인 32개교라니 다행이네요. 코로나 때문에 학력 격차와 사교육 의존이 더 심해졌어요. 이번 기회에 사교육을 늘리지 않고 공교육을 신뢰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마이크를 고쳐잡고 보도를 이어간다. "9등급 비율이 낮은 것은 그나마 다행입니다. 그러나 2017년부터 평준화고교 균등배정을 하였음에도 대입 실적이 고교마다 크게 다르게 나온 것에 대해 책임있는 답변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내신 3등급 이하 학생들의 역량을 위해서 어떤 노력이 있었는지 묻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청주 단재의 정성우였습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한반도에 수립된 지 20년이 되어 갈 때 '교육과 교육학'이 출간되었다. 그 덕에 교육이 뭐냐고 물으면, '인간행동의 계획적 변화'라고 즉각적으로 대답할 수 있게 되었다. 올해 1월 28일 저자가 별세했다. 향년 97세의 거목을 추념하며 교육계의 서태지를 불러본다. 반세기 넘도록 불만과 비판이 널브러진 교육에도 개념이라는 것이 있을까? 인성보다 지식을 중시한다고 따지는 사람은, 교육과 종교를 구분하지 않았다. 무용한 것만 가르치기 때문에 졸업 후에 다시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지식에서 기술이 파생되고 문예에 기반하여 사업이 확장된다는 사실을 무시했다. 불평등을 더욱 심화하고 있으며 계층 이동 사다리 역할을 포기한다고 비난하는 사람은, 교육부와 기획경제부의 역할을 혼동했다. 상대평가로 줄세우기를 한다고 비판하는 사람은, 교육감의 권한을 넘어선 문제를 요구했다. 가르쳤어도 인간행동의 변화가 없다면, 교육이 아니라고 그는 말한다. 능동적으로 변화시키려는 믿음이 있어야 교육이라는 것이다. 교육의 목적을 가치중립적으로 보았기 때문에 소매치기 능력이라도 차라리 의도된 계획에 따라 획득되면 교육으로 보았다. 변화에 대한 신념이 없어지는 현실과 교육이 없어도 스스로 힘만으로 학습이 진행되는 현실은 누가 봐도 안타깝다. 변화가 있더라도 계획이 없으면, 교육이 아니라고 그는 말한다. 교육과정이 없는 기관은 없다. 다만 학습자와 지역에 맞게 구성된 교육과정이 있느냐가 문제다. 가르치는 자들이 그것을 체득하고 있느냐는 더 큰 문제이다.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설계에 따라 학습이 진행되고 있는지 파악하지 못하면서, 코앞에 온 지방선거 때마다 보수와 진보의 진영논리만이 기승하는 것은 교육의 개념이 부실하다는 뜻이다. 학습자와 지역이 다른 만큼 교육과정이 다르지 않은 현실을 안타까워했으리라. 계획적인 변화를 시도하는 것은 사회과학의 일반적인 현상이다. 철학적으로나 과학적으로나 모호하지 않으면서 의미 있게 파악할 수 있는 인간행동을 규정할 수 있어야 교육이다. 그가 말한 인간행동은 교육목적에 가깝다. 시카고 대학의 블룸(Bloom)은 교육목적을 복잡성과 내면화 정도에 따라 분류한 바가 있다. 같은 대학에서 배운 그는 블룸의 인지적 영역을 지식, 사고력, 창의력으로 나누고 정의적 영역은 감정, 태도, 가치관으로 나누었다. 2015 교육과정의 용어로 표현하면 핵심역량이고, 요즘 용어로는 학습자 주도성(student agency)이다. 주도성의 개념이 명확하지 않고 단순히 구호로만 외치는 현실도 안타까워했으리라. 출간된 지 30년이 될 즘에 정범모 교수는 창의력에 대한 소신을 밝혔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자유가 있어야 한다. 이것이 창의력 교육의 제일 중요한 조건이다. 아니면 창의력은 압살될 수밖에 없다." 브레인스토밍 원칙에 기초하여 창의력을 신장시키려는 '계획적인 변화 활동'보다는 '부동의'의 자유를 주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근대국가가 학교를 세운 목적은 학습자의 자유가 아니었다. 현재의 학교는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목적을 설정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학생에게 '부동의'의 자유를 주지도 않고 인간행동을 계획적으로 변화시키지도 못하면서, 교육 패러다임이 바뀌었다는 말은 항상 들려왔다. 학교 선택권이 없는 학습자는 베푸는 계획에 온전히 의존하였다. 교육과정이 20년 전과 다르지 않아도, 성장의 변화가 보이지 않더라도, 그리고 학교의 비전이 상식적인 수준이더라도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답답한 현실을 두고 그분이 남기신 말을 상상해 본다. "19세기에 조직된 학교 제도로 미래 역량을 잉태하려면 학습자의 자유와 계획적 변화에 대한 두 개념이 모순이 없도록 설정하시오."
"어찌 민족이 영원합니까? 20세기 초반에는 자유 국가나 공산 국가와 연방을 이루는 것이 중국과 일본으로부터 오랜 세월 시달린 우리가 할 수 있는 현명한 선택이 아닌가요? 지금은 소프트 파워보다는 하드 파워를 더 키워야 이웃 국가들이 우리를 우습게 여기지 않습니다. 윤봉길의 한인애국단도 그런 목적이 아니었나요?" 그는 민족주의자였다. 사상도 변하고 신앙도 변하지만 피와 역사를 같이하는 민족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 옛날 희랍 민족과 로마 민족이 그랬듯이 우리 민족도, 비록 해방된 지 2년이 되지 않았지만, 세계 역사의 무대에서 주연배우로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인류에게 사해동포 의식을 심어주고 새로운 생활 원리를 제시하고 실천하는 것이, 하늘이 우리 민족에게 준 사명이라고 외쳤다. 은나라의 현인 기자가 가고 싶어한 나라, 공자가 가고 싶어한 단군의 나라를 상기시키면서 지금이야말로 인류에게 평화와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사상을 낳아야 한다고 젊은 교육자에게 외쳤다. 참으로 그 꿈이 모세나 예수보다 컸다. 상해로 가기 전부터 백범은 실천하는 사상가였고 교육자였다. 어린 창암은 공자의 도를, 18세의 창수는 동학의 도를, 23세의 원종은 석가의 도를, 28세의 구(龜)는 예수의 도를 배웠다. 동학군을 이끌어 해주성을 공격하였고 을미사변을 일으킨 일본군을 직접 살해하기까지 하였다. 고종 황제의 은혜로 사형을 면한 후에는 탈옥을 하였고 44세에 임시정부 경무국장을 맡기 전까지는 기독교를 통해 애국 계몽운동의 교육사업에 헌신한다. 문지기가 되고자 한 그의 눈에 공산혁명을 부르짖는 국무총리 이동휘와 민주주의를 주창하는 대통령 이승만이 국무회의 자리에서 싸우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 양반 계급은 남경과 북경을 서울로 삼았고, 친일 세력은 동경을 서울로 삼더니 독립 투사는 워싱턴이나 모스크바를 서울로 삼으려고 하였다. 급기야 신채호에 의해 이승만이 탄핵되는 현실을 목도하게 된다. 국토가 빼앗겼을 때는 철학마저 없어서 존 로크나 칼 맑스의 철학만을 받아들이려고 하였다. 그는 맑스주의가 헤겔의 변증법, 포이어바하의 유물론, 그리고 아담 스미스의 노동 가치론 등 서양 사상의 정수를 융합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과학적인 방법론이라고 우기는 변증법이 뉴턴이나 아인슈타인에 의해 인정되지 않고 있음도 알고 있었다. 맑스주의가 소련의 국가 권력에 의지하면서 사문난적을 양성하는 조선 주자학파보다 더 무섭게 민족 문화를 소멸시키고 국민을 속박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중경(충칭)에서 꿈에 그리던 고국에 돌아왔어도 사상의 철학은 여전히 독립을 하지 못한 비참한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백범이 꿈꾸는 나라는 '자신도 행복하게 하고 남도 행복하게 하는 문화'의 힘을 가지고 있는 나라이다. 당시에는 미국이 그런 나라에 가장 가까워 보였다. 미국인은 서양의 위대한 가치인 언론의 자유, 투표,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있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이기적인 개인주의의 자유는 꽃을 심는 자유가 아니라 꽃을 꺾는 자유에 가까웠다. 남의 것을 빼앗는 문화도 아니고 남의 덕을 입으려는 문화도 아니고 남에게 주는 것을 낙으로 삼는 문화 국가는, 자유의 가치 외에도 추구해야 할 가치가 더 있다. 이것이 갖추어져야 인류에게 희망을 주는 문화 국가가 된다. 문화대혁명의 늪에 빠진 한족도, 탈아입구에 빠진 왜족도 인류에게 희망을 주지 못하였다. 아메리칸 드림도 태평양을 넘지 못하였다. 백범 서거 후 70년이 지나 그의 꿈이 한류가 된 것인가· 한류가 지나가는 유행이라면 빈곤한 철학을 억지로 찾을 필요가 없지만, 유행이 아니라면 아름다운 문화 강국의 힘이 교육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에 대하여 물어야 한다.
짧은 질문을 받았다. "교직은 노동직, 전문직, 성직 중에서 어디에 해당되나요?" 머리가 하얀 임용 면접관이 20대 중반인 나에게 던진 질문이었지만 반백이 넘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질문이다. 그 질문은 예상 문제 중의 하나였다. 같이 시험을 본 친구들과도 교직이 왜 전문직인지에 대해 논리를 세워두었다. 면접을 마친 발걸음은 가벼웠다. 교육 현장에서 노동할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현장에 와보니 정말 교직은 노동직이었다. 그 중요하다는 학교 공개 수업과 운동부 지도는 신규의 몫이었다. 전문적 경력을 요구하지 않았다. 수업을 제대로 했다는 단순한 증거 서류를 일주일 단위로 작성해야 했다. 학생들과 창의적인 수업을 어떻게 전개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감사에 필요한 서류를 반드시 갖추는 것이 더 중요했다. 주위 눈치와 자기 검열 때문에 작은 양심마저 쪼그라들었다. 지도서와 교과서를 벗어난 내용과 사고를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던 그때도 학생들에게 창의성을 강조했고 교사에게는 자율성을 강조했다. 내가 소가 되어 웃어주었다. 열린 교육의 광풍이 휘몰아치고 수행평가가 학교에 정착될 즘에 모든 학교에 학습센터로서의 도서실이 마련됐다. 교과서를 벗어난 자료를 정보통신과 연결해 학생 중심으로 이끌어가기 위한 시설도 들어섰다. 학생들끼리 협동하면서 통합된 주제를 학습하는 것이 주류가 되어 갔다. 지금 유행하는 학습자 중심성(student agency)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그러나 교사가 수업을 주도하면서 학생 중심의 학습을 하라는 모순을 극복할 만큼 교사는 전문적이지 않았다. 강의식으로 하지 말고 토론식으로 하라고 지시가 내려왔지만, 지식을 이해하는 수준을 벗어나서 학생의 사고를 확장시킬 만큼 교사는 학습하지 않았다. 교직의 전문성은 진보 교육감이 당선되면서 의식되었다. 학교장만이 가지고 있던 자율성이 교사에게도 주어졌지만, 교과서보다는 성취기준을 가르치라는 말을 납득하지 못했다. 2009 교육과정에서 다루었던 성취기준이 너무 많아 '핵심 성취기준'이라는 용어까지 만들어져 교사에게 제시되었지만,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2015 교육과정으로 바뀌었다. 던져진 자율성은 전문성으로 빨리 전이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혁신학교 운동에 헌신한 사람들은 교직의 전문성을 강하게 믿고 있었고 현실 속에 실현하고자 노력했다. 교실에서 학생이 학습을 하는 것 못지않게 교사도 학습을 하는 공동체를 꿈꿨다. 이것이 이른바 '전문적 학습 공동체'다. 업무지원팀이 별도로 꾸려지면 이 위대한 공동체 안에서 교사가 모든 문제를 자연스럽게 해결하기를 소망했다. 전문적 학습 공동체는 생각보다 더디게 발전했다. 누가 봐도 비전문적인 것도 '전문적 학습'이라는 미명으로 불렸다. 코로나 탓만은 아니다. 교육청이 예산 지원을 덜한 탓도 아니다. 내부자 비판의식을 내리 누리는 침묵이 깊어지고, 아무런 성장도 보장하지 않는 위로만을 서로 건네고 있다. 왜 그런가? 학생들에게는 학습 공동체를 꾸리게 하면서 왜 교사의 학습 공동체는 볼품이 없는가? 교직의 전문성을 흩뜨리는 편견이 오래전부터 싹트고 있었다. 교직도 부정적인 의미의 서비스직이라는 것이다. 전화 상담원이나 대형 마트 판매원과 다를 바 없는 감정 노동자라는 인식이 교권이 추락하는 만큼 자라고 있었다. "아빠! 신부님이나 스님은 성직자라고 하는데 다른 직업 중에는 그런 이름을 붙일 수 없나요?" 신(神)이나 불(佛)을 입으로 부른다고 거룩한 것이 아니다. 사람을 섬기는 자가 섬김을 받는다고 했다. 부모를 섬길 수 있는 자가 모든 사람을 섬길 수 있다고 했다. 사람을 섬기는 성직이 되지 않고서는 전문성도 참된 노동도 교사와는 관계없으리라.
검찰은 보은군의 의로운 교사를 기소했다. 법원은 벌금 1백만 원을 선고했다. 확정되면 교사는 교육청의 징계를 감수해야 한다. 누구보다 법을 잘 지켰던 교사였기에 1백만 원의 선고도 사형 선고처럼 다가왔다. 반사적으로 항소를 했다. 죄는 의외로 간단하다. 역사 교사로서 맘속으로만 품어야 할 의로운 생각을 판사에게 묻지 않고 지역 시민들과 당당하게 실천에 옮긴 죄다. 그 죄를 이해하려면 50여 년 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4·19혁명 정부를 1년 만에 무력으로 진압한 쿠데타 세력은 참으로 난감한 두 과제를 만난다. 그들의 지도자가 광복군을 때려잡았던 관동군 장교라는 사실을 알든 모르든 간에, 지금은 공산당과 결별했다는 것을 보여줘야 했다. 그리고 경제를 개발해서 무능한 장면 정부보다는 효율적이라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 과제를 해결하는 열쇠는 미국만이 가지고 있었다. 세계 GDP의 50%를 차지하며 자본주의 황금기를 이끌고 있었던 미국은, 소련과 차가운 전쟁을 하는 중이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한국과 일본이 연합해 동북아시아와 태평양을 완전히 수호하기를 원했다. 친일 세력을 이용은 했어도 일본과 수교를 하지 않았던 이승만과 달리, 박정희는 1965년 일본과 수교를 맺고 무상 3억불, 차관 2억불을 받는 대신에 일본에 대한 청구권을 포기하는 것에 합의했다. 일제 강점기 당시 일본제철에 강제 징용을 당한 후 임금을 받지 못한 분들이 일본 재판소에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2003년까지의 재판에서 패소하고 기각을 당한다. 2008년에 서울중앙지법은 '일본재판부 판결이 국내에서도 효력이 있으며, 현 일본제철이 옛 신일본제철을 승계했다고 볼 수 없다'라는 이유로 마지막 생존자 한 분의 가슴에 못을 박았다. 다음 해에 서울고법은 항소를 기각했으나 2012년의 대법원은 원고의 손을 들어줬다. 2013년 서울고법이 1억 원씩을 배상하라고 판결하자 일본기업이 불복했고 2018년 10월에서야 한국의 법원은 원고 4명에게 1인당 1억 원의 위자료 배상을 확정했다. 이에 아베 내각이 2019년 7월부터 반도체 생산에 필수적인 품목에 대해 한국으로의 수출을 규제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일본제품 불매운동이 일어났으나 아베 입장을 지지하고 한국 정부를 비난하는 여론도 있었다. 2019년 8월 26일 '이장 워크숍'에서의 보은 군수 발언이 그랬다. 동학농민운동의 시초인 보은의 치욕이라는 평가가 있었고 보은지역 농특산물 불매운동도 벌어질 판이었다. 코로나 사태와 더불어 아베 군수 주민소환 운동이 벌어졌다. 주민소환투표 요건이 충족될 즘에 충북선관위는 주민소환 서명부를 공개하기로 결정한다. 좁은 지역 사회에서 불이익을 당할 것이 뻔했다. 아베 군수를 소환하려던 운동본부는 소환운동을 철회하면서 서명부 공개를 취소할 것을 촉구했다. 작년 가을 법원이 서명부를 공개하지 말라고 선고한 후에야 선관위는 항소를 포기하고 군수는 항소를 취하했다. 이것으로 갈등이 끝난 줄 알았으나 1백만 원이 선고됐다. 지역 시민단체 대표였던 교육공무원이 2020년 1월에 주민소환에 관한 법률 제10조 제2항을 어겼다는 것이다. 허용할 수 있는 기자회견을 하면서 주민소환 청구를 위한 서명 요청 활동을 했다는 말이다. 선관위 자문을 받았고 선관위의 현장 감시에 따라 기자회견을 진행했건만 법원의 권위가 얼마나 높은지를 보여줬다. 안중근은 사형 선고에 대해 항소를 하지 않았다. 정의가 죽어버린 그 사회에서는 그런 행동이 두려움을 보여주지 않는 유일한 길이었다. 정의가 살아있는 이 사회에서는 판사의 양심이 행동하는 교사의 양심을 단죄해서는 안 된다. 하늘 아래에 두 개의 다른 양심이 있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KBS에서 20년간 방영된 코미디 프로 '개그 콘서트'가 작년에 폐지됐다. MBC에서 17년간 방영된 코미디 프로 '웃으면 복이 와요'가 폐지된 지는 한 세대가 지났다. 교육하면 복이 온다고 주장하는 '교육콘서트'는 삶 속에서 아직도 방영된다. 고릿적부터 종교에서는 극락을 제시했고, 정치에서는 백성의 풍요로운 삶을 목적으로 삼았다. 철학에서도 인간 삶의 목적을 행복에 둔다. 교육의 목적도 언제나 행복이다. 현 교육감이 출범하면서 생긴 혁신학교는 전 교육감의 다(多)행복 구호를 행복씨앗으로 바꾸어 사용하고 있다. 단재초등학교도 행복한 미래를 열어가겠다고 한다. 교육까지 행복만을 제시해버려서 차별화된 활동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교사의 가르침이 향하는 목적은 학생이 배움 자체를 즐기는 데에 있다. 논어의 첫 구절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는 어린 학생들의 삶의 태도가 아니라 30이 넘고 40이 넘은 어른들이 지녀야 할 태도이다. 나이가 들수록 이처럼 배움을 즐기고 있으니 어린 학생도 배움을 즐기라는 뜻이다. 가르치는 교사에게 배움의 즐거움이 없을 때, 지식은 생명력을 읽고 전달력만 높아진다. 학생만이 배움을 즐기는 곳이 학교가 아니다. 교육의 목적은 배움을 즐기는 교사의 존재를 전제한다. 배움을 즐기는 교사가 살아있는 비전이다. 그래야 양심이 흔들리지 않는다. 만일 우리 모두가 배움 자체를 즐길 수 있다면, 노력과 상관없이 주어진 결과를 합리화하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자세도 점점 사라지리라. 양심이 흔들릴수록 배우고 싶은 것만을 배우게 하려 한다. 배우고 싶지 않은 교과나 단원을 무시하려고 한다. 배우고 싶지 않는 내용은 시험을 위해서만 배운다. 상대평가 체제의 내신과 수능은 천사들도 악마로 변하게 할 수 있다. 배움을 즐거워하지 않는 교사와 부모가 늘어나고 상대적 평가체제가 고착화될수록 학교가 학생들에게 길러주는 역량은 슬픈 인내심뿐이다. 눈치 빠른 아이들은 배움이 실생활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데도 열심히 배워야 하는 이유를 스스로 찾아낸다. 배움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안정과 권력을 얻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배움이 없어도 그것을 이룰 수만 있다면, 배움을 버리게 된다. 합격하지 못하고 승진을 하지 못한다면, 아무도 배움에 대해 찬양하지 않는다. 졸업 이후에라도 배움이 즐거웠다고 고백할 수 있다면 다행이다. 학교 홈페이지나 현관에는 배움이 즐거움이라고 선언되고 현실에는 벌거벗은 임금님이 참 많다. 수업이 온라인으로 공개된 교실로 가보았다. 담임의 속을 박박 긁어가며 헛소리를 하던 아이도 이날만은 바른 자세로 앉아 있다. 담임의 입은, 웃음기를 머금고 있었다. 담임의 눈은, 평소와 다른 아이들과 낯선 손님을 번갈아 보느라 흔들렸다. 그 마음은, 빈 교실에서 긴 한숨을 내쉴 준비를 한다. 한 시간만큼만 외부 감사자가 있어서 배움을 즐겼다. "학교 선생님은 우리에게 기본개념은 가르쳐 주세요. 그런데 그뿐이죠. 혼자서 자기 주도적 학습을 지겹도록 해야 해요. 집안이 넉넉하면 과외나 학원의 도움을 받겠지만 우리 부모님은 일용직입니다. 곧 학교 선생님이 중간고사 문제를 냅니다. 저는 노력을 해도 맞출 수가 없는 문제가 많아요." 배움의 결과에 만족할 수 있는 학생도 11%를 넘지 못한다. 오직 11%를 위한 공부라면, 물론 그들도 즐거움이 없는 배움이지만, 아무도 행복의 씨앗을 뿌릴 수는 없다. 89%가 즐거워하는 배움이 쉬운 길은 아니지만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 고교학점제에 대해 생각이 다른 두 교육 단체가 연합을 이루고 학부모단체와 교육청이 뜻을 같이하는 것을 보면서, 89%가 즐거워할 수 있는 배움의 길에 나도 한 표를 던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