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 좋고 바람 상쾌한 오전이면 근처 산을 찾는다. 인적 드물어 조용한 산속 길을 걸을 때면 항상 즐겁고 행복하다. 글감 정리도 하고 간밤에 읽은 책에서 기억나는 구절을 싱그러운 바람결과 더불어 음미하니 보람된 시간이다. 아침의 고요 속에서 자신에게만 집중할 수 있어 좋다. 소중한 이 시간이 엉클어질 때가 있다. 볼륨을 한껏 올린 휴대폰으로 트로트나 종편 관련 뉴스를 들으며 걷는 사람들과 마주칠 때이다. 이어폰으로 혼자 들으면 좋으련만 하는 수 없다. 걷는 방향이 같을 때는 한참을 멈추어서 그 사람을 멀리 보내고, 방향이 갈리면 걸음을 재촉하여 소음에서 속히 벗어나곤 한다. 이 조용한 곳에서 굳이 주위를 시끄럽게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기실 포용심으로 대하면 트로트 정도는 용인하겠으나 괜한 정치 이야기는 짜증을 돋운다. 대한민국 국회 수준을 논하는 것은 이미 진부한 일이라 정치 관련 뉴스가 나오면 아예 채널을 돌리는 사람도 많이 있다 들었는데. 정치 문제는 일부러 신경 쓰지 않는 사람도 있거늘 산길에서조차 정가의 가십거리를 끼고 사는 이들의 삶에 정치는 어느 정도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가. 현명한 사람은 그의 관심과 영향의 차이가 크지 않은데 그렇지 못한 사람은 관심과 영향의 차이가 크다고 한다. 관심을 저 멀리에 두지 않고 도달 가능성을 감안하되 노력을 바탕으로 결실을 본 후, 그 결과를 주변에 영향으로 남기는 태도가 현명하다는 것이리라. 역사 속 위인들은 안목이 원대하고,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로써 얻은 소득은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가르침이 되었으니 순리처럼 관심이 영향으로 귀결될 수 있었다. 어떤 사람이 욕을 섞어 뉴스를 보면서도 오히려 그 뉴스 내용에 빠져들어 자기와 다른 관점이거나 내용을 잘 모른다고 사람 취급도 안 하는 태도라면 지혜롭지도 못한 자세이다. 아울러 관심 어린 뉴스를 시청한 결과를 살피자면 주변에 어느 정도 좋은 영향을 주었을지를 가늠하기도 어렵다. 이렇게 보면 정치인이 본인과 당의 이익을 염두에 두고 있으면서 겉으로만 국민을 거론하는 것이나 백성들이 현실과 괴리된 정치 이야기로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나 결국에는 매한가지가 아닌가. 현명한 사람은 실생활에 유익한 내용에 관심을 둔 뒤 관심 지경으로 자신을 투입하여 상황을 발전시키려 노력한다. 인생을 잘살고 있는 이른바 고수들은 바람직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즉시 실행하고 하수는 그와 반대로 실행을 뒤로 미룬다는데, 마음을 두면 즉시 행동으로 옮기는 태도가 차라리 현명하겠다. 마침 에 연관하여 살펴볼 내용이 있다. 이천선생(伊川先生)의 말씀으로, "인심(人心)의 따름은 친애(親愛)하는 자를 따르는 경우가 많으니, (상인)常人의 (정)情은 사랑하면 그 옳은 점만을 보고 미워하면 그 그른 점만을 본다. 그러므로 처자(妻子)의 말은 비록 잘못된 것이라도 많이 따르고 미워하는 사람의 말은 비록 선(善)하더라도 악(惡)하게 여긴다. 만일 친애(親愛)한다고 하여 따르면 이는 사사로운 정(情)으로 더부는 것이니, 어찌 정리(正理)에 합하겠는가." 선생의 가르침에 의하면 한쪽만 살피거나 자기 좋은 분야에 치우치지 않고 두루 친애하는 사람이 현명하다 하니, 편협되지 않는 자세와 마음가짐으로 일상에서 호기심을 키운 뒤 관심 가는 분야에 정성을 들여 삶의 수준을 올리는 것이 좋겠다.
인간에게 장신구는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대표적인 장신구는 반지와 팔찌이며 여름날 젊은 여인의 발목에서 발찌도 간간이 눈에 띈다. 반지는 권위, 충성과 결속의 상징이자 사회적인 지위를 나타내는 수단이 되며, 상대에게 속해 있다는 구속의 증거도 된다. 팔찌는 오래전부터 인류가 애용해 온 장신구로 장식의 목적 외에 마귀를 쫓고자 착용했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신석기 시대 조가비 팔찌가 등장한 이래 조선 시대를 제외하고 부녀자들의 대표적 장신구로 자리하고 있다. 귀금속 가게를 운영해 오던 막내 여동생이 건물주가 업종을 바꾸려는 때문에 점포 정리 겸 반값 세일에 들어갔다. 우리 형제들도 도와주고자 평소 같으면 언감생심 하던 고가의 금붙이를 살폈고 이를 물실호기로 나선 사람들은 집안의 세 분 며느리이다. 막내 제수씨는 팔찌를 옐로우, 화이트로 두 개나 사고, 둘째 제수씨도 눈 딱 감은 남편 덕에 화려한 물방울무늬 아롱진 명품 팔찌를 팔목에 들였다. 그런데 문제는 다름 아닌 나다. 육십 평생, 마음 놓고 돈을 써 본 적이 없고 팔찌에 대한 필요성을 공감 못 한 때문인지 주저하다 그만 구매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사실 아내가 패물을 지니지 않게 된 사연이 있다. 군 입대 후 첫 휴가를 나왔을 때, 아내 손에 이끌려 막 완성 중인 3층 연립주택 앞에 서게 되었다. 아내가 말하기를, "여보! 우리가 살 집이 저기야." 그래도 집은 남편이 마련해야 하는데 군에 있는 남편을 제치고 혼자서 집을 장만했다는 거다.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으로 이런 집을 어떻게 샀는가 물었더니 결혼 때 받은 패물을 몽땅 처분했단다. 이 패물 사건은 그 뒤로 부부싸움의 단골 메뉴가 되긴 했다만 아무튼 아내는 그렇게 집을 키워갔다. 운동과 공부밖에 모르는 철부지 남편에게 점차 넓은 집과 더불어 차까지 사 주었다. 풍족하지 못한 살림살이에 남편 뒷바라지를 하려니 휘황한 팔찌는 고사하고 변변한 반지도 끼지 못하고 살았다. 반지는 불편하여 안 낀다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인 채 우리 아내는 작은 귀걸이 정도로 족하다고 무디게 생각을 굳혔던 거다. 그런데 얼마 전, 동서들은 남편이 나서서 팔찌도 색깔별로 구색 맞춰 사 줬다는데 당신은 대체 뭐 하느냐며 잔뜩 볼메어 쏜다. 자! 타이밍을 이미 놓쳤는데 이거 난감하게 되었다. 며칠 지나 둘째 딸이 내려 온 기회를 틈타 그간의 정황을 살며시 이야기하며 여인으로서 네 의견은 어떠한가 물었더니 역시 예상한 바의 답을 낸다. 이왕지사 욕을 들을 만큼 들었는데 이제 와 사 준들 빛 보기는 애당초 글렀으니 그냥 버티라는 냉정한 딸년이다. 잔뜩 화난 아내를 무심한 척 상대하려니 좌불안석이요 심사는 갈수록 불편해진다. 조카들이 취직하면 큰아버지로서 양복 한 벌을 선물해 주는데, 마침 취직한 조카딸이 고모를 생각하고는 옷 대신 귀걸이를 사달라는데 아내의 부은 얼굴이 또 걸린다. 하는 수 없이 둘째 딸한테 너도 이참에 귀걸이 하나 고르면서 반드시 엄마를 모시고 가서 엄마의 눈이 꽂히는 팔찌를 슬그머니 걸어 드리라 했다. 다 늦게 무슨 팔찌냐며 싫다고 버티긴커녕 여동생의 가게라며 팔찌 찬 팔목 사진과 함께 '엄청 예쁘지? 고마워'라는 문자가 온다. 늦게나마 체면치레는 했으니 다행히요, 이제 부은 얼굴을 안 보겠다는 안도감이 든다. 동생들보다 먼저 팔찌랑 발찌까지 해 주었더라면 콧노래 흥얼거리며 팔목 발목 번쩍번쩍 자랑삼고자 여름을 고대하고 동서들에게 은근히 뻐길 수도 있었으련만. 공연히 망설이다 괜한 고생을 했다. 마침 며느리들이 차도 마실 겸 우리 집에서 모인다기에 각자 팔찌를 차고 오라 했다. 서로 팔목을 내보이며 팔찌 품평으로 거실 가득 웃음꽃 번지니 좋다. 모두 모두 남편 건사와 아이 키우며 알뜰살뜰 살아가느라 고움이 주름으로 바뀌어 가는데 비록 백만 원을 상회하는 금팔찌이건만 속박을 이처럼 감사하니 고맙다. 지금처럼 웃고 떠들며 행복하게 살면 되지 뭐. 광채 나는 팔찌처럼 빛나는 삶으로!
세안과 면도는 일과 시작의 필수 불가결한 절차이다. 면도를 안 하면 추레하게 보이고 여기에 코털까지 더부룩하면 아무리 잘 씻어도 추한 이미지를 피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이따금 콧구멍이 간지러워 무의식중에 손이 갈 때가 있다. 화장실 거울에 유심히 비춰보면 어김없이 코털 한 가닥이 삐져나와 코를 괴롭힌다. 아침에 잘 다듬는다고 했건만 요놈은 살벌하게 돌아가는 전동 코털 깎기 날용케 피하고 세상에 나왔구나. 점잖은 자리에서 대화 중에 앞 사람의 코털이 거뭇하게 나와 있으면 복잡한 감정이 스미는데 주인에게 존재를 확인시키려는 나의 코털 한 가닥도 상대에게 분명 그런 느낌을 줄 것이다. 중년이 지난 남성은 남성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이 5알파 환원 효소와 결합해 만드는 DHT라는 대사물질 양이 늘어 코털이 더 길게 자란다. 이 DHT가 콧속 모낭의 성장촉진인자(IGF-1)를 생성하여 결국 털이 더 길게 자라도록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나이가 들수록 머리카락은 얇아지고 눈썹이나 코털은 길고 두껍게 된다. 그러고 보면 옛적 신선은 얼핏 긴 눈썹이 두드러지는 용모이나 필시 코털도 길고 두꺼웠을 텐데 요즘처럼 성능 좋은 코털 깎기도 없었을 테니 코털 때문에 인간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을 참고 살았겠다. 눈에 거슬린다고 코털을 잡아 뽑는 것은 위험한 처사이다. 코털은 콧구멍으로 들어오는 공기의 온·습도 조절과 더불어 이물질을 걸러 우리 몸의 1차 방어막을 담당하고 있다. 게다가 우리의 코는 세균이 몸에 들어오는 핵심 통로이므로 세균이 득시글한 곳이다. 코털이 피부 깊숙이 박혀 있어 모공도 크므로 잘못 뽑았다간 세균감염으로 인한 상처의 위험 또한 크다. 세균이 상처에 들어가면 염증이 생겨 코 주변이 붓기도 하고, 자칫 염증 물질이 돌아 뇌막염이나 패혈증까지 일으킬 수 있다니 조심해야 한다. 가렵다고 무턱대고 잡아 뽑을 수도 없는 거다. 인체의 터럭 중에 눈썹이나 코털은 머리털처럼 자라지 않고 외관상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중요한 구실을 한다. 눈썹은 눈으로 들어가는 땀과 빗물 등을 막고, 코털은 몸으로 들어가는 외부 세균을 일차 차단한다. 드러나는 것이 모두 중요한 것은 물론 아니건만 이렇게 코털 한 가닥도 우리의 일상 리듬을 망칠 때가 있으니 작다고 무시할 일은 결코 아니다. 일제에 잡힌 독립운동가들이 제일 두려워한 것이 대나무 꼬챙이로 손톱 밑을 찌르는 고문이었다고 하니 우리 몸을 괴롭히는 것은 크기와는 상관없다는 거다. 우리가 저지르는 잘못도 그렇다. 커다란 잘못만 우리의 본성과 양심에 저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작디작은 잘못도 본성을 해치는데 똑같은 결과와 아픔을 초래한다. 그러므로 큰 잘못과 마찬가지로 작은 잘못도 방심하지 않고 마찬가지로 조심해야 한다. 선비들이 자신을 수양하면서 정미극고의 자세로 공부하고, 매일 존양과 성찰로 자신을 닦고자 노력한 것이 이 때문이다. 드러난 코털이야 가위로 자르면 그만이지만 내면에서 자라는 좋지 못한 마음은 무엇으로 자른단 말인가. 존심(存心)도 어렵거니와 구방심(求放心)도 마찬가지로 중요함을 살면서 수시 깨닫게 된다. 매일 저녁에 차와 더불어 음악을 들으며 그날을 되새기는 것은 하루의 반성이겠고, 저녁에 읽은 책 내용을 이튿날 산록에서 반추하는 것도 분명 성찰이겠으나 어디 선인들의 절치부심한 자기 수양에 비할쏜가. 밖으로 나온 코털은 뽑지 않고 코털 깎기나 코털 전용 가위를 이용하여 삐져나온 부분만 다듬는 게 좋다. 여러 합목적적 이유로 열쇠고리에 자그마한 맥가이버칼을 달고 다니는데 기왕 이 칼이 코털 다듬기와 더불어 남명 선생의 경의검(敬義劍) 역으로 심성 수양에 더 이바지하도록 대해야겠다.
어린 시절 동네 어른에게 받은 토끼 한 마리를 위해 아버지께서는 토끼장까지 만들어 주며 잘 키워 보라 하셨다. 토끼털이 배설물로 더럽혀지는 것을 막고자 토끼장 바닥 판자의 틈을 벌려 오줌과 똥이 잘 빠지도록 안배도 해 주었다. 새하얀 털에 빨갛고 동그란 눈이 예쁘고 오물오물 먹는 모양이 귀여웠다. 그래서 토끼 먹이를 뜯어다 주려고 학교 끝나기 무섭게 들판으로 내달리곤 했다. 이렇게 정성껏 먹거리를 조달해 주었건만 이쁜 토끼는 제대로 크지 못하고 얼마 뒤에 죽고 말았다. 눈이 퉁퉁 붓도록 울면서 그렇게나 열심히 먹이를 주었는데도 굶어 죽었다는 사실이 어린 눈에 매우 의아했었다. 최근 반추에 관련된 내용을 들었다. 반추란 되새김질 작용으로 보통 4개의 방으로 나누어진 반추위(反芻胃)를 가지고 있는 기린, 사슴, 소, 양 따위의 초식동물에 해당하는 말이다. 맹수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면 기회 있을 때는 먹이를 저장해두고 시간이 있을 때 되새김질해 소화하는 생존법이다. 이러한 생존본능으로 네 개의 위가 생긴 것인데, 신기한 것은 위가 한 개밖에 없는 토끼도 반추를 한다고 한다. 토끼가 초식 위주 동물이기는 하지만 반추위를 가진 동물도 아닌데 어떻게 반추를 하겠는가. 가만히 보면 자기의 배변을 되먹어 영양분을 재흡수하는 소화 행위를 한다니 이 또한 반추에 해당하는 모습이다. 토끼의 이러한 식습성을 모르고 너무 애지중지하여 영양소 재흡수 기회를 앗아버려 결국 죽게 만들었나 보다. 반추동물처럼 우리 인간도 반추하고 있을까. 위가 하나밖에 없으니 당연히 반추 활동을 하지 않을 듯하나 인간 역시 반추와 유사한 행동을 한다고 한다. 다만 위에 저장된 음식물을 식도로 통과시켜 되씹는 것은 아니고 머리로 반추를 하는 것이다. 뇌에 저장된 기억을 되살려 좋은 기분을 느끼는 것은 긍정적 반추이겠고, 과거 내용을 살펴 앞으로 바람직한 부분으로 개선한다면 창조적 반추가 되겠다. 살다 보면 좋은 기억도, 기억하기 싫은 것도 있을 것이다. 인간의 삶은 즐거운 추억이 많을수록 더 행복하기에 순간순간을 행복하게 보내고자 노력을 한다. 그러다가 좋지 않은 결말을 맞기도 하고, 이러저러한 상실감으로 회한이 가득하게 되면 응어리진 과거 기억을 끌어내고 있으니 이는 불행한 삶이다. 좋지 않은 기억의 상처는 오래가므로 그 기억 속에 머무르게 되니 계속 이어지는 불행감이 우울증까지 야기하기도 한다. 조선 시대에 잘 나가는 기생집은 문전성시를 이루었단다. 어여쁜 기생의 마음을 얻고자 혈안인 한량은 재물로도 환심을 얻지 못하면 급기야 자기의 앞니까지 빼 주곤 했단다. 나이 들어 은퇴한 퇴기에게는 홍안으로 피부에 윤기 흐르던 시절 정신 홀린 서방님들의 앞니가 담긴 봉지만 남는다. 인적 끊겨 휑한 집안에서 떠나간 임들의 이빨을 어루만지며 과거를 그리워한 때문인지 퇴기들은 여염집 여인보다 수명이 짧았다고 한다. 사람들은 잘못했을 경우 잘못을 깨달으면 반드시 고칠 결심을 하면 될 것이다(지과필개知過必改). 그러나 자기 자신을 변명하기 급급하거나 잘못에 대하여 동의를 하지 않으면 잘못을 고치려는 마음조차 갖지 않는다(과이불개過而不改). 증자와 같은 성인도 하루에 세 번 반성했다는데 우리 같은 필부들은 반성을 아무리 많이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주어진 여건을 최선으로 만들 뿐 아니라 최선의 여건을 갖추려 미리 노력을 한다는데 기왕이면 자신에게 도움이 되도록 과거를 반성하는 창조적 반추가 더 나은 삶을 위한 자세이겠다. 긍정적인 생각으로 과거를 살피는 것도 일종의 온고지신(溫故知新)이리라.
계묘년 새해가 밝았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한해를 선물로 더 주심에 대하여 감사의 마음을 제일 먼저 든다. 30대에 같이 근무했던 동료 교사 중에 벌써 세상을 달리하신 분이 10여 명을 훨씬 넘는다는 말을 들으며 송연해진다. 내게 허락된 시간은 얼마나 남았을까 싶어 하루하루를 더 소중히 여기게 되고 또 미련없도록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다. 신년 벽두에 갖는 마음가짐을 통상 '옷깃을 여민다'라고 표현도 하는데 많은 말 중에 하필 옷깃을 여민다라고 할까. 선비가 다른 사람의 집을 방문할 때에 옷매무시를 단정히 가다듬는데 이 경우에도 옷깃을 세 번 여민다고 한다. 원래 한복의 옷고름이 동작 중에 자주 풀어지기 때문이겠지만, 외부의 상태는 물론 마음마저 주일 무적(主一無適)의 경건한 태세로 유지하려는 의지가 표현됐으리라. 불가(佛家)에서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하여 최소한 70억분의 1의 확률을 소중히 여기라고 가르친다. 사람과 무의식중에라도 맺게 되는 인연을 소중히 여기라는 의미가 있다. 정작 옷깃은 의복의 목둘레에 돌려대어 앞으로 여미는 부분이라 다른 사람과 옷깃을 스칠 정도라면 가까워도 한참 가까운 관계여야 한다. 소매깃이라면 저잣거리에서 지나치다가 이 사람 저 사람과 부지불식간에 스치는 경우가 나오겠지만 옷깃을 아무하고 스치기란 쉽지 않다. 부부와 연인 사이가 아니라면 옷깃을 스칠 정도로 다가갈 수가 없으므로 다만 가까이 대하는 사람을 소중히 여기라는 뜻이 되겠다. 한복에는 옷깃과 더불어 옷섶이 있는데 저고리나 두루마기를 착용할 때 앞을 여밀 때 중심부로 오는 천을 말한다. 옷섶은 행동 중에 쉽게 벌어지므로 속의 옷이 드러나지 않도록 갈무리하거나 어른을 모시고 공손히 자세를 취할 때 매무새를 신경 써야 하는 부분이다. 그러므로 마음가짐을 공고히 하고자 할 때는 옷깃을 여민다는 말보다 옷섶을 여민다는 말이 더 정확할 듯싶기도 하다. 외부의 찬 공기를 막아 몸을 보호하거나 엄숙한 자리에서 자세를 공손히 취할 때 옷매무시를 단정히 하려면 옷깃보다 옷섶을 먼저 단속해야 하지 않겠나. 어렸을 적 정월 대보름날 동네 근처 동산에 모인 할머니랑 아주머니들이 짚단을 엮어 달 불을 태우며 점차 솟아오르는 달을 향해 두 손을 모아 경건하고도 간절히 기원하던 모습이 기억에 선하다. 정초에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셨던 이분들도 산에 오르기 전에 세수하고 옷매무시를 단정히 했으리라. 국량 넓은 위인이라면 나라와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련만 시골 서생은 나와 가족의 안위에 대한 소망이 우선이다. 옷고름 여미고 수양한 결과 도량이 조금이라도 깊어져 상대해 본 사람들이 가까이 할 만하다 인정해 주면 고맙겠고, 가족 간에 제일 불편한 관계가 수숙(嫂叔)이라는데 오라버니 같은 시아주버니로 자리하면 좋겠다. 취미인 골프로는 에이지 슈터(age shooter)를 이루는 해가 되면 좋겠는데 그리하려면 몸 관리를 더 잘해야겠지. 사회에 대한 바람이라면 각계 지도층들은 박기후인(薄己厚人)과 선우후락(先憂後樂)의 마음가짐으로 언행에 모범을 보이고 직분에 책임 있는 자세를 지닌다면 상호 신뢰가 깊어지겠다. 사람들은 전전긍긍하는 태도와 얇은 얼음을 밟는 자세로 조심하여 잘못을 멀리한다면 분명 편안한 사회가 될 것이다. 이미 500여 년 전에 세상에 착한 사람이 많아지는 것을 바라신 퇴계 선생의 소망도 아름다운 사회의 실현에 있었다. 세인들의 조심하는 태도가 바로 옷깃을 여미는 마음이리니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그리 상대한다면 가능할 것이다.
몇 해 전부터 동생들이 3남 1녀 피붙이만의 여행을 해 보자는데 며느리가 걸리고 사위가 켕겨 미뤘더랬다. 막냇동생이 여행 경비를 부담한다며 올해 가기 전에 날을 잡자고 채근한다. 축협 임원으로 제주도를 자주 들락거리더니 현지인처럼 제주도를 안내할 수 있다 하여 2박 3일의 일정 안내를 맡겼다. 노모와 막내 여동생은 다음에 같이 하기로 했는데 여행 계획을 들은 며느리들이 다음엔 자기들만 가겠다 한다. 늘 바쁘다던 큰형이 시간을 내주었다며 공항에 먼저 도착한 동생들이 상기된 표정으로 맞이한다. 임시 가이드는 사전 안내 없이 따라만 오라는데 제주에서의 오전 첫 일정은 한라산 기슭의 1천100고지 어승생악이다. 이제껏 제주도를 여러 번 와 봤어도 여기는 처음 밟는다. 신선한 공기를 가슴 열어 받아들이며 걷는데 어디를 가는 것도 좋지만 누구랑 함께 하는 가에 따라 재미가 다르다더니 정녕 그렇다. 어릴 적 추억을 함께 한 동생들의 살짝 굽은 등을 뒤에서 바라보려니 치솟는 상념에 가슴이 뭉클해진다. 다들 참 열심히 살았구나! 다음 장소로 이동하는데 차창 밖으로 내리는 햇살이 90년대 배낭여행으로 외국에 갔던 때의 느낌처럼 찬란하다. 점심 후엔 교래자연휴양림의 곶자왈 숲을 걷는데 마치 체력훈련 기회인 듯싶다. 평소 낙가산을 자주 오르며 느낀 기운과 제주도의 싱그런 공기와 싸아한 겨울 기운은 전혀 다르다. 동행자가 이렇게 중요하다. 이리 좋은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나. 숨을 깊게 들이마시기도 하고, 겨울에도 파란 잎을 자랑하는 길가 고사릿과 풀을 묵언 중에 스치다가 어머님에 대하여 그리고 6·25 참전용사이신 선친과의 기억을 나누려니 오후가 금세 지난다. 근동에서 형제간 우애가 돈독하기로 소문난 우리이고 효자의 아내로 살기란 피곤하다고 며느리의 항변도 듣지만 그래도 어디 족하겠는가. 이번 생신 때에는 도다리쑥국을 좋아하셨던 거제로 1박 2일 여행을 다시 가면 좋겠다는 동생의 제안이 고맙다. 한 많은 시골 결혼 생활로 여민 몸이라 바닷물만 보면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다 하시는 노모님의 콧노래를 얼마나 더 들을 수 있을까. 저녁 식사 장소는 용두암 근처 용두골인데 기름진 돔회도 일품이지만 지리는 배부른 데도 너무 맛있다. 주방 아줌마에게 이리 맛난 국은 처음이라 했더니 사골국처럼 기름 동동 뜨는 돔 지리를 만들어 보내 주겠단다. 택배로 냉동 지리를 받아 황홀한 맛을 대할 며느리들의 표정이 궁금해진다. 간장게장과 보리쌀 들어간 열무김치도 덧붙여 부탁하고 흐뭇한 마음으로 자리에 들었다. 침대 세 개가 들어간 방인들 어떠랴 하고 잠자리에 드는 데 문제는 나이 든 동생들의 코 고는 소리이다. 아니나 다를까 자돈 수천 마리를 키우느라 긴장하여 설자는 버릇이 든 막내가 작은형의 코 고는 소리 때문에 한잠도 못 잤다고 야단이다. 설령 잠은 설쳤지마는 어릴 적 이불 한 장을 같이 덮고 잤던 기억을 베고 오랜만에 한방에서 잤구나. 다음 날 오전은 성산일출봉 등정이다. 주차장 부근의 빽다방에 차 한잔 마시려 들어갔는데 뒤이어 수학여행 온 고등학생 한 무리가 스스럼없이 들어오니 이제는 다방까지 어린 것들에게 점령당한 느낌이다. 우리 국민의 커피 소비량이 과연 얼마나 될까. 칼바람 맞으며 정상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이어서 한라산 중심으로 변화무쌍한 제주 날씨를 골라 비교적 겨울 일기가 평온한 북쪽 해변을 드라이브하였다. 하얗게 부서지는 포말과 연두색 바닷물이 멋진데 막내가 어머님을 위하여 제주 바닷가에 집을 구하고 있다고 한다. 물론 형들의 달 살이도 가능하다 하므로 동생 덕에 제주에서도 즐기겠다. 더불어 선친의 훈장증 확인이 잘 되어 바라던 현충원 모심이 가능하겠다는 소식도 또 하나의 낭보라. 사계절 날씨에 우박까지 하루에 다 경험한 것보다 형제들과 함께한 것이 더 좋은데 내친김에 며느리들 모시고 외국 여행도 추진해 봐야겠다. 愛日堂을 건립한 선인들의 마음처럼 어머님과의 시간이 점점 아까워지는데 우리 4남매가 어머님 보시기 좋도록 잘 살아야 마음 편하시렷다.
산책하면서 보도 한복판에 어지러이 널브러져 있는 전동 킥보드(e 스쿠터)를 자주 보게 된다. 어디 그뿐이랴 요즈음은 카카오 자전거(T 바이크)까지 행인이 가야 할 길을 버젓이 막고 있다. 양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사용하고 나서 사람의 통행에 방해되지 않도록 길가에 얌전히 세워두어야 하는데 화장실 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더니 볼일 후에는 아무렇게나 방치해 버린다. 차를 타기엔 어중간하고 그렇다고 걷자니 먼 경우에 이용하고자 문명의 이기로 활용은 잘 하는데 자기 편의주의가 이성을 가려 뒤처리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 우리 집은 단독주택이라 집 앞 이면도로는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주차장으로 이용된다. 차고가 없어 집 가까운 곳에 주차하는 처지인데 자리만 조금 비면 다른 차가 파고들므로 시골에서 온 농작물이나 쇼핑물 등을 내려야 할 때면 멀리서 하차하기 때문에 힘이 곱절 든다. 워낙 주차가 난리인지라 남의 집 대문을 반 가리는 것은 그래도 참을만 하다. 주차했던 자리에 자기가 피웠던 담배꽁초와 마시고 난 커피잔이나 콜라 캔 등을 버리고 가는 것은 무슨 심보람. 주차했으면 응당 뒤의 자리도 깔끔하게 해야 한다는 것은 사람이라면 다 알 것이다. 이따금 집 주변에 널린 쓰레기를 청소할 때마다 대한민국 국민의 문화 수준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일은 어디에서 연유하였기 때문일까. 가정과 학교에서 자기의 영달과 행복에 대한 성취욕만 가르쳤기 때문이겠다. 수기치인과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는 삼척동자도 아는 말이건만 머리로는 알건만 행동으로 보여주려하지도 않는 사람이 대다수처럼 느껴진다. '옛날에는 자기 자신을 위해 학문을 했는데 오늘날에는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한 학문을 한다(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論語 憲問編)고 했던 공자의 말처럼 자기를 위한 학문(위기지학-爲己之學)을 공부한 연후에 다른 사람을 위한 학문(위인지학-爲人之學)으로 발전해야 하는데 내실을 갖지 못하다 보니 다른 사람을 위한 여력도 없고 관심도 없는 것이다. 공부는 먼저 자기의 몸과 마음을 바르게 가다듬은 연후에 이것이 이루어지면 다른 사람을 편안하게 해야(修己安人) 한다. 수기단계 없이 자신을 과시하고 주변 사람에게 인정을 받고자 입신양명을 목표로 하면 오로지 자기의 발전과 이익 추구에 눈이 흐리게 된다. 이렇게 성장한 사람들이 많아졌기에 우리 사회에 내로남불이라는 단어가 일상화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우리의 先人들은 자기에게는 박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너그럽게 하라(박기후인-薄己厚人)을 가르쳤는데 어느 사이에 정반대의 고약한 풍조가 자리를 가로채 버렸으니 통탄할 일이다. 킥보드를 탄 뒤에 자기 편할 대로 아무렇게나 버리고 가는 사람에게 타인에 대한 존중이나 배려심이 있겠는가. 문명을 누리려면 그에 상응하는 매뉴얼은 당연히 알아야 할 것이다. 잘 탔으면 잘 두어야 다른 사람들이 사용하기에도 편하고, 지나치는 사람의 마음에도 아름답게 보인다. 자기 집 물건이라면 저리하진 않았을 것이다. 인성교육이라는 용어가 애당초 문제가 있어 인품교육이나 품격교육으로 사용되어야 한다는데 모쪼록 품격있는 사람으로 처신을 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렇게 자기의 목전 편리와 편의 위주로 행동한 아이들이 훗날 성인이 된 뒤의 사회를 생각하면 염려스럽지 않을 수 없다. 요즘은 사람들이 모두 행복을 최우선으로 삼고 있다. "행복은 삶의 태도에서 나오게 됩니다. 불의를 정의로 생각하고, 이기주의적인 행동을 하게 될 때 불행이 찾아옵니다." 행복이란 가끔 우연히 찾아오는 즐거움이 아닌, 성실함에서 비롯된 삶의 '가치판단'이라는 것이요, 인격을 갖춰지지 않았을 때 불행이 찾아온다는 김형석 교수의 말도 사람은 먼저 자기 자신을 닦아야 한다는 위인지학의 당위성과 연계되는 듯하다.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은 '서원행'이라는 프로그램으로 주말에 1박 2일간 가족 또는 친지들의 서원 및 퇴계 관련 유적 답사 등을 지도위원이 도와준다. 저렴한 참가비도 장점이며, 참가한 사람들의 만족도가 높기에 아내에게 효과를 얘기했더니 우리 가족도 서원행에 가 보자 한다. 이따금 안동에 가는 할아버지가 어떤 일을 하는 지도 볼 겸 두 딸 아이 가족과 우리 부부랑 모두 8명이 참가 신청을 하였다. '서원행'은 참가 희망자의 의견을 고려하여 마련되는데 우리는 퇴계 선생의 제자 금난수 선생이 지은 '고산정'과 퇴계 선생의 '태실' 답사를 부탁했다. 딸들이 초등학교 5학년과 3학년 여름방학 때 도산서원과 영주 부석사에 갈 계획을 세우고는 기왕에 하나씩 맡아 발표해 보라 했다. 어느 날 아이들 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문을 열어봤더니 『동아 대백과 사전』을 방에 한가득 펼쳐놓고 둘이서 징징거리고 있다. 발표 준비를 하려니 너무 막막했나 보다. 큰 애가 도산서당을 발표할 때는 옆에 사람이 없었는데, 둘째가 부석사 관련 내용을 켄트지 전지에 적어 발표할 때는 지나던 사람이 돌발 질문을 해도 막힘없이 대답을 잘했다. 아마 그때 숙제를 완수해 냈기에 후일 공부를 주도적으로 하게 된 듯하다. 둘째가 하필 촬영차 우즈베키스탄으로 출국 일정과 겹치게 되어 큰 애 가족만 서원행에 참가하게 되었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 남편과 함께 두 딸을 데리고 도산서당을 바라보는 큰 애의 심정은 어떨까. 우리를 안내하는 분은 공부가 깊은 이강호 지도위원이다. 선생의 『理學通論』을 풀어 강의하는 듯 도학의 심오한 경지까지 넘나들며 설명을 하는데 어른은 집중하건만 아이들은 곤충 구경에 정신이 팔렸다. 퇴계 종택의 추월한수정에서 종손 어른께 인사를 드리자 손주들과 하이 파이브로 인사를 해 주시는 어르신이 고맙고 꼬마들도 다행히 25분여를 잘 견뎌준다. 어르신이 말씀을 마치고 무릎을 꿇자 바로 앞에 앉아 있던 큰 손녀 지온이도 눈치 빠르게 같이 무릎을 꿇는다. 사위에게는 1인당 1매씩 나누어주던 조복(造福) 봉투를 10여 매 더 주며 친구들에게 주라 하시니 '소원선인다'를 풀고 싶어 하시는 속마음을 알겠다. 처음에는 낯설어하던 손주들이 오후가 되자 이강호 위원의 팔에 매달리고 재롱을 떠는데 아직 손주가 없는 이분은 처음 당하는 경험에 어색하지만, 함박웃음으로 어쩔 줄을 모른다. 둘째 날 5시 반에는 새벽 산책으로 여느 때처럼 도산서원을 가는 대신에 벼르던 청량산 축융봉을 오르기로 했다. 중간까지 차로 가면 정상을 다녀와도 무리가 없겠다는 계산인데 새벽어둠을 뚫고 가 보니 등산로 정비 때문에 입구가 닫혔다. 하는 수 없이 경사 심한 길을 조심 운전하여 청량사부터 하늘다리까지 다녀왔다. 讀書如遊山(독서는 산에 오르는 것과 같다)이라 하니 오늘 산에 오른 것도 역시 독서의 일환이렷다. 둘째 날 첫 일정으로 방문한 고산정은 구름 한 점 없이 잔잔한 물에 고스란히 비쳐 '미스터 선샤인'의 촬영지에 걸맞는 황홀한 정경으로 우리 가족을 대한다. 아이들은 물수제비를 뜨기도 하고 모래 장난을 하느라 신나고 어른들은 사진 찍느라 바쁘다. 이육사문학관에서 설명이 끝난 뒤에 언니에게 '청포도'를 낭송하라 했더니 소미가 저도 읽겠다고 내 귀에다 들리지도 않게 소곤댄다. 눈치를 채고 마이크를 입 가까이 대 주자 6살짜리가 이육사 선생의 절명시 '광야'를 또박또박 잘 읽는다. 두 아이에게 이 또한 좋은 추억으로 자리하리라. 하루에 조복(造福) 글자를 100여 장 쓰시는 종손 어른께 종잇값에 보태시라 봉투를 드린 사위도 대견하고 이 지도위원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낸 지온이랑 영어로 서원행 느낌을 잘 정리한 소미도 기특하다. 修己 뒤에 治人을 하며 修身 연후 齊家가 수반되나니, 우리 아이들 공부 더 깊어지고 손녀들은 잘 커서 후일 자기 분야에서 역량을 발휘하는 훌륭한 사람이 되면 좋겠다.
한 달 전, 수련원 본부 직원들이 맨발 걷기-跣足步行을 한다기에 마음 편히 따라나섰다. 어렸을 때 고무신은 비싸서 꿈도 못 꾸었고, 대부분 평평한 나무 바닥에 타이어를 가늘게 썰어 발등 걸개를 만든 일본 신발 '게다'를 신고 다녔다. 그런데 미루나무 게다로 땅을 끌고 다녔기 때문에 뒤축이 금방 닳아버려 필자를 포함한 대부분 아이는 게다를 허리춤에 달고 맨발로 등하교를 했었다. 이런 기억으로 맨발 걷기는 자신 있었는데 신발 신었을 때는 그리도 곱던 길이 맨발로 대하니 온통 왕모래가 되고 날카로운 조약돌이 되어 발바닥을 괴롭힌다. 한 걸음 한 걸음 고통을 참으며 한 시간여 걸었는데 같이 걷던 옆 사람처럼 물집은 안 잡혔어도 발바닥에 난리가 났다. 덕분에 2, 3일간 발바닥을 느꼈어도, 전립선과 이명 그리고 꾸준히 하면 안경도 벗는다니 결단코 다시 도전해 보리라. 11월 5일 함양 상림 공원에서 맨발로 걸을 기회가 있었다. 걷다가 괴로우면 포기하고 신발을 신으려 배낭까지 준비했건만 꼼지락거리다 선두를 놓치는 바람에 신발을 보관소에 두고 출발했으니 천상 끝까지 가야 한다. 다행히 바닥의 돌들이 작아 발을 덜 찔렀고 부지런히 쫓아가느라 고통 느낄 여유가 없었다. 그러할지라도 발걸음에 집중하려니 길가의 사운정조차 보이지 않고 상림 공원의 가을 풍광이 눈에 들어올 겨를 없이 40여 분을 감내했다. 경험 많은 사람들은 의연하게 걷는데 왕초보야 발에 신경이 쓰여 살금살금 걷느라 몸을 옹송그리지만 계속 걸었다. 다음날 오랜만에 낙가산을 가면서 기왕이면 맨발 걷기에 다시 도전해 보고 싶었다. 맨발 걷기가 건강에 그리 좋다니 좋은 일은 빨리해도 오히려 늦고, 나쁜 일은 늦게 해도 빠르다 하지 않는가. 산길에서 이따금 맨발로 걷던 사람들도 봤거니와 영상 2도 아래로 내려가기 전에 최대한 걸을 기회를 마련해야 한다. 신발주머니까지 들고 집을 나선 뒤 산길에서 맨발로 지면을 대하는데 느낌이 이전과는 확연히 다르다. 수년간 걸었건만 산이 살아서 다가오는 듯하고, 소복이 내린 낙엽으로 폭신한 덕에 뾰족뾰족한 자갈돌도 견딜만하다. 골퍼가 그린을 제대로 느끼려면 맨발로 대하라 하더니 맨발로 걷는 산길은 등산화로 대하던 때와는 정말 다른 느낌이다. 산길에서 발로 접하는 낙엽이 사뭇 엄숙하다. 나무가 최선을 다해 일년을 보내고 감연히 갈무리한 결과가 낙엽이려니 잎새 하나가 귀하고 소중하다. 여러 계절을 함께 한 뒤에 헤어짐 당하는 낙엽의 심사는 어땠을까. 나무는 뿌리로 주위 나무들과 대화를 한다는데 이별을 앞둔 잎새와 어떤 말을 나누었을까. 너랑 헤어져야 내가 모진 겨울을 견딜 수 있으니 이게 최선이라고 설득했겠지. 이별이 못내 서러워 떠나지 못하는 잎은 바람이 도와주렷다. 남향 길이라 그런지 땅 기운이 따스하게 올라온다. 천지지만 만물지간에 내가 서 있으니 문자 그대로 天地人 三才요, 조심스런 발걸음에 나의 존재를 다시 깨닫는다. 가끔 보이는 가시 뾰족한 밤송이를 밟으면 안 되겠기에 더욱 발 앞을 주목하니 불가에서 강조하는 조고각하(照顧脚下)는 절로 되겠고 반구저기(反求諸己)도 덩달아 이루겠다. 이따금 길 파임 방지용 둥그런 나무에 발 아치를 자극하니 거참 시원하다. 퇴계선생이 번열(煩熱)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온계공에게 용천혈 주무르기를 알려 주었다는데 earthing으로 몸의 정전기를 내보내고 전립선도 좋아지고 발아치를 다시 세우며 용천까지 문지른다면 장수도 가능하겠단 생각이다. 맨발 걷기(跣足步行)로 산을 걸으면 선족 산행이요, 낙엽 위를 걸으면 낙엽 보행이다만 꾸준히 걸어 내가 모르는 몸의 허한 부분까지 보해 준다면야 참 다행이겠고. 인적없는 산속에서 오늘따라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가 더욱 크게 들린다.
구양수는 당송 8대가 중 한 분이자 『오대사기』와 『신당서』를 저술한 사학자로 북송 시대의 사람이다. 이 가을에 불현듯 대표작 중 하나인 「추성부」가 읽고 싶어졌다. 그런데 어느 날 구양(歐陽)선생과 마찬가지로 오싹한 기분이 들 정도로 가을 소리를 느끼게 되니 놀랍고 참 별일이다. 동자라도 있으면 나가서 소리의 근원을 살펴보라 할 텐데 "별과 달은 밝고 깨끗하며 밝은 은하수가 하늘에 있는데, 사방에 사람 소리는 없고 소리는 나무 사이에서 납니다."라 답할 동자가 없다. 스스로 뜰에 나가 이제는 싸늘한 가을 정취를 느끼려니 하늘에 달은 밝은데 시린 바람의 성화에 외벽 기둥에 걸린 오로벨 소리만 청아하다. 구양 선생은 가을의 소리를 처량하고 간절하며 울부짖듯 세차게 일어나, 많은 풀이 푸르고 성하게 무성함을 다투고 아름다운 나무가 울창하여 즐길 만하다가 풀은 이것이 스치면 색이 변하고 나무는 이것을 만나면 잎이 떨어지니, 시들고 떨어지게 하는 것이 바로 이 한 기운이 남긴 매서움이라 했다. 그래서 형조판서를 秋判이라고도 하는데 하늘은 만물에 대하여 봄에는 키워 주고 가을에는 열매 맺게 한다. 周易에서 원형이정으로 사계절을 구분하여 가을은 利에 해당하여 겨울을 대비하며 엄숙히 갈무리하므로 글자에 칼 도자가 들어있는가. 「추성부」 말미에서는 '초목은 감정이 없어 때가 되면 날리어 떨어지지만, 사람은 동물이고 오직 만물의 영장(靈長)이다. 온갖 근심이 그 마음을 느끼게 하고 수많은 일이 그 몸을 수고롭게 하여, 마음속에 움직임이 있으면 반드시 그 정신을 동요시킨다. 하물며 자신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바를 생각하고 자신의 지혜가 할 수 없는 바를 근심하는 경우이겠는가. 짙게 붉던 얼굴이 마른 나무처럼 되고, 까맣게 검던 머리가 허옇게 되는 것이 마땅하다. 어찌하여 금석의 재질도 아닌데 초목과 더불어 무성함을 다투고자 하는가? 누가 이것에 대해 상하게 하고 해치는 가를 생각해보면 또한 어찌 가을 소리를 한탄하겠는가'라고 지혜로 귀결한다. 생각 없는 동자야 답할 마음도 없이 꾸벅꾸벅 졸고 있지만, 세상 이치를 깨닫는 노인은 가을 소리에도 인생을 느끼며 깊이 탄식한다는 내용이 「추성부」이다. 우리나라의 단원 김홍도 선생이 돌아가시기 1년 전에 추성부를 시의도(詩意圖)인 수묵담채 「추성부도」로 그렸다. 창문 안에는 노인이 앉아 있고 동자는 손으로 나무를 가리키며 그 사이에서 소리가 난다고 하는 모습을 표현했다. 중국식 둥근 창안에 홀로 앉아 있는 노인은 구양수이자 김홍도 본인이겠고, 적막하고 스산한 느낌의 그림에서 단원의 말년에 옹색하고 불우했던 삶의 분위기가 드러난다. 단원이 잘 나갈 때에는 그의 그림을 얻으려 문전에 인산인해를 이루고 더불어 창고도 풍성했다는데. 만물이 늙어지면 슬프고 상심하게 되는 것처럼 이제는 주위에 사람도 없이 외롭고 쓸쓸한 주변을 탄식하고 있음을 나타내어 볼수록 처연해진다. 게다가 그림 밑에 붙은 작자 미상의 시에 가슴을 아린다. - 獨自破曉 (독자파효) 홀로 밤을 지새우며 - 月色雲開不在明 (월색운개부재명) 구름은 열렸는데 달빛 밝지 않고 據憑窓際聞秋聲 (거빙창제문추성) 창가에 기대니 가을 소리가 들리네. 愛唱多情感 (청공애창다정감) 귀뚜라미 노랫소리 다정한 느낌인데 夜鳥何其未寢成 (야조하기미침성) 밤새는 어찌하여 잠을 못 이루나. 산록 길에서 한참 벗어난 중턱의 바위에 앉으면 나무에 스치는 바람 소리와 더불어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에 햇볕 내려오는 소리도 들리는 듯하다. 아래 골짜기에는 월동준비로 먹이 찾는 왕 다람쥐가 부산한데 어느덧 햇살조차 무겁게 여기는 나뭇잎들이 서서히 나무를 떠나고 있다. 이번 가을은 「추성부도」에 관련된 단원의 말년 생활을 읽은 탓인지 독자파효의 시구가 가슴을 후렸기 때문인지 늦도록 잠을 못 이루고 가을 달도 더불어 느끼곤 한다. 이상하게 이번 가을은 가슴이 시리다. 입때껏 느끼지 못했던 사추기(思秋期)가 이제사인가. 아니지, 나이가 들어가는 게다.
도산선비문화수련원과의 인연으로 도산서원을 드나든지 5년 동안 서원 방문객들이 가장 풍광 좋은 곳으로 여기며, 강 건너에 있는 저 섬은 어떤 곳인가 하는 질문을 많이 하는 곳이 시사단이다. 얼핏 인공섬 모양이 동쪽은 뱃머리요 서쪽이 배꼬리라는데 반 십 년 동안 보통 기회로는 얻기 어려운 휘영청 밝은 보름달 아래에서도 봤고, 꽃피는 춘삼월과 북풍한설 몰아치는 한겨울에도 지나쳤건만 정작 단에 올라보지 못한 미진함이 있었다. 역사는 발로 기록한다고 말을 하면서도 눈으로 보라며 손으로 가르치기만 하는 아쉬움을 누가 알랴. 폭우로 전국이 몸살을 앓을 때 즉석 공부차 서원에 들르게 되었다. 통상 방문객은 점심 이후에 시작하여 4시 넘어 많이 옴을 고려하여 자리를 지키는데 비 때문인지 방문객이 없어 점심시간 직전 30분 정도의 자투리 시간이 생겼다. 걸음만 빨리한다면 그동안 벼르기만 하던 시사단을 다녀올 듯하여 석간대 아래의 잠수교로 내닫듯 이동했다. 이 다리는 평시엔 물에 잠겨 있다가 농번기와 갈수기에 모습을 드러내는데 빗줄기가 워낙 거세어 혹 잠길까 염려도 되지만 시사단을 보려는 열망이 더 크다. 긴 우산으로도 장대 같은 비를 막기 어려워 무릎 아랫도리는 이미 젖고 파란 두루마기도 빗물로 짙푸르게 변해버렸지만 어디 개의할 손가. 시사단의 돌계단은 아래 물에 잠기던 부분은 하얀데 물맛을 못 본 위 측 계단은 까맣게 변색하여 세월의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 빗물 골지어 흐르는 계단을 조심스레 올라 드디어 시사단 비각을 마주 대하니 감개무량하다. 비각을 살펴본 뒤에 몸을 돌려 건너편을 바라보는데 빗줄기 속에 도산서원이 천연대와 천운대를 좌우로 하고 비구름을 어깨에 이고 아스라히 다가온다. 평상시 바라보던 정반대에서 대하려니 정녕 새롭다. 일찍이 계상정거도를 그렸던 겸재 정선과 스승 성호 이익의 분부를 받잡아 도산서원도를 그렸던 표암 강세황의 정경 살핌이 이랬겠다. 1792(정조 15년)에 도산 별과를 시행한 것을 기념하여 1796(정조 20년)에 시사단을 설단 하였는데 1801(순조 1년)에 남인의 영수였던 번암 채제공 추탈(죽은 사람의 관직을 빼앗음) 관련으로 시사단이 파훼 된다. 당시 예안 현감 김직행이 아전에게 시사단비를 파괴하도록 명했는데 처음에 도끼날로 비석을 절단하고 기둥은 베어 길가에 넘어뜨렸다는 보고를 받고 매질을 했단다. 다시 그 비석을 조각조각 부수고 도끼로 비각에 썼던 기와와 돌까지 남김없이 가루로 만들어 버림으로 파괴를 마무리 지었다. 당시 예안 현감이야 음직 벼슬일 텐데 권력에 기댈 욕심으로 심사가 고단하여 이리 악랄했나 보다. 원래 비석의 형체는 이미 사라졌고 지금 보는 시사단비는 녹색 역암이거니와 비문은 당시 영의정이었던 채제공이 지어 도산에서 별과가 시행된 연유와 과거를 시행하는 경과를 밝힌 위에 다음의 詩로써 마무리하였다. 陶水洋洋 其上也壇(도수양양 기상야단-도산의 물은 넘치고 넘치게 흐르고 그 위에 단이 있도다.) 壇有階級 水有淵源(단유계급 수유연원-단에는 계급이 있고 물에는 연원이 있나니) 登壇臨水 觸類而伸(등단임수 촉류이신-단에 올라 물에 나아가서 류를 따라 뜻을 펴노니) 先正之化 聖主之恩(선정지화 성주지은-선생의 덕화요 임금님의 은총이로세) 우산을 타고 떨어지는 굵은 빗물과 함께 단 옆에 서 있으려니 생각이 줄을 잇는다. 영남 사대부가 萬人이라는 山南 선비들의 자부심도, 비가 그치면 해가 뜨듯 역사에는 흥망성쇠의 부침이 있고 새벽이 지나면 밤이 오는데 의롭지 못하게 부귀를 추구하고 한때의 영화를 갈구한 욕심 때문에 뒤가 아름답지 못함까지도 비각에서 본다. 비에 씻긴 시사단을 보는 감흥도 새기며 좀 더 있고 싶은 마음을 다리가 걱정된다는 이성이 억누르매 마지못해 발걸음을 되돌렸다. 그 잠깐 사이에도 다리가 더 잠겼으니 지체했더라면 낭패를 볼 뻔했다. 수년간 벼르기만 하던 것을 얼결에 이뤘더니만 마치 어려운 숙제를 해낸 학생 같은 후련한 마음으로 물 차오르는 강을 건넜다.
요즘에는 종종 집의 문기둥이나 가구 모서리를 살짝 부딪치기도 하고, 걷다가 발걸음이 한쪽으로 쏠리는 때도 있다. 예전에는 생각지도 않던 일인데 잘 있는 나무 등걸에 어깨를 부딪치기도 하고, 발걸음 비틀할 때가 있어 산을 걸을 때는 스틱을 하나라도 갖고 가야 안심이 되며 산길에 스틱이 있음을 감사히 여길 때가 많다. 나이가 들어 그러려니 여기면서도 이제 서서히 균형 감각이 무디어 가기 때문이라 여기면 허전해진다. 같이 라운딩하던 선배가 나이 70만 넘어 봐라 그렇게 비거리가 나오느냐며 경험상 70이 분수령임을 확신으로 단정하는데 과연 그럴는지 모르겠다. 균형 감각이 무디어 가고 근력이 빠져가는 나이인지라 선배의 경험에서 나오는 말이 인정하기 싫지만 지나가는 말로 들리지는 않는다. 여느 때처럼 아침에 나서서 산록길을 걷는데 앞에 가는 사람의 어깨가 왼쪽은 올라갔고 오른쪽은 심하게 내려가서 몸의 밸런스도 맞지 않고 더불어 자세도 좋지 않아 걸음걸이까지 시원찮다. 그런데 그 뒤에 따라 걷는 나이 든 어떤 사람은 가슴이 뒤로 쳐지고 아랫배가 앞으로 나온 품새라 허리를 제대로 펴지 못하면서도 열심히 걷고 있다. 둘 다 건강에 문제가 있거나 평소 자세를 잘못 잡아 급기야 밸런스가 무너졌고 몸도 저리 비뚤어진 듯하다. 내부의 문제가 밖으로 나올 지경이라면 사연이 오래되었을 터이고 외상으로 저리되었을지도 모르니 그간 여러 가지로 고생이 심했겠다. 두 사람을 보면서 좌우와 전후가 균형을 맞추어야 온전한 모양이 되며 왼 걸음이 나간 뒤에는 오른 걸음이 그만큼 나가 주어야만 바르게 앞으로 나갈 수 있음을 본다. 사람의 건강에서도 오장 육부가 서로 도와주면 상생이요, 도움이 안 되면 상극이 되고 정도가 지나치면 實이라 하고 모자라면 虛가 된다 하는데 모두 아픈 경우가 되니 이 역시 밸런스를 잃어 나타나는 문제이다. 사람과 자연에 있어 균형 즉 밸런스는 아주 중요하다. 공부하면 휴식을 취해야 하고, 낮에 일하면 밤에 잠을 자서 균형을 맞춰야 한다. 선비들은 방을 藏修의 공간으로 하여 공부하는 곳으로 마련하였고 마루는 遊息의 장소로서 휴식하는 공간으로 하여 균형을 유지하였다. 더불어 집을 공부의 공간으로 하였다면 정자는 휴식의 장소로 하여 역시 균형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선비들의 일과 지침서 격으로 공부하는 사람들이 아침마다 외워 하루를 시작했던 숙흥야매잠에서도 '독서하고 남은 시간에는 자연에 몸을 맡겨 마음이 헤엄치듯 편안히 하고, 정신을 느긋하게 펴서 본성과 감정을 편안하게 쉬게 하라' 하여 밸런스를 유지하는 데 신경을 쓰고 있다. 이리 보면 나아감(進)에 물러남(退)이 있고 올라감(高)에 내려감(底)이 있으며, 음이 있으면 양이 있음도 역시 밸런스로구나. 천지와 좌우 그리고 장단 등 균형 아닌 것이 없다. 나무도 잎이 무성하면 뿌리로 지탱을 해야 하고, 왼쪽 가지가 실하면 오른쪽 가지도 그만큼 튼튼해야 줄기를 올곧게 유지하여 태풍이 와도 모진 바람을 이겨 낼 수 있다. 몸과 마음의 밸런스를 갖추는 것은 건강 유지와 함께 삶의 처신 문제로 다가온다. 이를 잘 정리한 것이 경재잠(敬齋箴)이다. '움직일 때나 좌정할 때나 어기지 말고 겉과 속을 서로 바르게 하라. 잠시라도 틈이 있게 되면 삿된 욕망이 만 가지로 일어나서…. 털끝만큼 어긋남이 있으면 하늘과 땅이 뒤바뀌게 되니 삼강이 무너지고 구법이 역시 뒤섞이게 되느니라' 하며 밸런스를 유지하지 못함을 경계하고 있다. 밸런스와 조화를 강조하는 우주 안에서 소우주인 인간도 본성과 감정의 밸런스를 기본으로 윤집궐중(允執闕中)에 도달하고자 노력하여 역시 잊지도 않고 조장하지도 않으면 이윽고 공부하는 사람들의 소망인 居敬에 접근하지 않을까 감히 생각해 본다.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던 중 부부간 대화 양상이 나왔다. 살아온 모습만큼이나 다양한 예가 있는데 결혼 기간과 대화를 안 하는 부부가 정비례한다는 것이다. 살아가면서 부부는 서로 닮는다는데 그만큼 상통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굳이 대화를 안 해도 의사 표현에 문제가 없어 그런지도 모르겠다. 사랑으로 맺어져 가정을 꾸렸건만 뜨거웠던 사랑도 3년 정도면 서서히 식어가고, 이후에는 정으로 자식 때문에 참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 부부들이다. 그런데 평소에는 말없이 지내다가 만약 대화할 필요가 있으면 카톡으로 대신하는 부부도 있다니 솔깃해진다. 대면할 기회마저 회피한 채 각자의 생활을 고수하는 명목상의 부부가 더 편해지는 것이다. 남녀 간의 이야기 특히 규방 지사는 외부로 발설하기도 어려운 일이라 외모만큼이나 부부간의 이야기는 다양할 수밖에 없겠으나 톡 소통을 들으면서 선생의 편지가 떠 오른다. 山天齋 李咸亨(字는 平淑, 1550~1586)은 순천 사람으로 20세 무렵에 69세의 퇴계 선생을 찾아가 도산 서당에서 사사한 제자다. 선생 말년에 심도 있게 강술한 것이 心經이요, 그 심경에 주석을 달아 「심경 강록」, 「심경 질의」 등을 저술할 정도로 高弟였다. 1년간 수학하고 귀가하는 제자에게 선생이 '이 사람 평숙! 이 편지를 도중에 열어보지 말고, 사립문 앞에서 열어보게'라 하며 한 통의 편지를 주신다. 피봉에 도차밀계간(道次密啓看)이라 하여 도중에 은밀히 열어보라는 지시도 있다. 당시 편지는 사사로운 내용일지라도 선생의 말씀일 경우에는 제자들이 배독(拜讀)이라 하여 존경하는 마음으로 그 편지를 펼쳐놓고 공손히 읽기도 하고, 편지에 관하여 토론을 하는 문화가 있었다. 그리하여 선생은 제자 월천 조목에게 편지를 하면서 이 편지는 아직 공개하지 말라는 당부를 하기도 한다. 이로써 보면 고봉과 사단칠정론 관련으로 8년간 주고받은 117통 편지는 두 분의 조용한 소통이 아니라 조선 선비들에게 초미의 관심사라 이 내용을 모르면 지식인 그룹에서 대화도 어려울 정도였다. 선생은 편지에서 공자 맹자의 말씀을 들어 천지가 있고 난 뒤에 부자가 있고, 부자가 있은 다음에 군신이 있고 군신이 있은 다음에 예의를 둘 곳이 있다고 말하고는 만물이 있고 난 뒤 부부가 있음을 강조한 뒤에, '내가 일찍이 겪은 일을 말한다면, 나는 재혼을 했으면서도 참으로 불행했네. 그렇지만 나는 감히 댁을 박대하려는 마음을 가져본 적이 없었고, 잘 대접하려고 수십 년 동안 갖은 노력을 다했네. 그 사이 때로는 마음이 흔들리고 번거로워 참기 힘겹고 민망한 때도 있었지만 어떻게 정을 돌릴 수 있는가. 인간이 지켜야 할 중대한 인륜을 저버리고 홀어머니와 나에게 맡긴 처부모에게 근심을 끼칠 수 있는가? (중략) 그대는 마땅히 몇 번이고 깊이 생각하여 허물을 고치는 바가 있어야 할 것이네. 또 여기서 끝내 마음을 바꾸지 않으려고 한다면 학문은 어떻게 할 것이며 실천은 할 수 있겠는가. 군자의 도는 부부생활로부터 이루어진다네.'라 말한다. 아마 이함형 부부가 금슬이 매우 나쁘다는 것을 다른 제자들에게서 듣고 편지를 준 듯한데, 제자는 대오각성하여 스승의 가르침대로 부부 관계를 돈독히 하였다고 한다. 이 서간문은 1577년에 세상을 달리한 아들의 유품을 정리하던 아버지 손암 이식(1522~1587, 이조참판 역임)에 의하여 다시 퇴계 문중으로 돌아오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인륜의 기본이 부부생활이요, 부부생활을 원만하게 하는 데서 예의가 생기고 학문의 빛도 발한다는 말이 와닿는다. 제자를 깨우치기 위하여 나이도 한참 어린 제자에게 솔직하게 자신의 가정사를 토로해 내는 선생의 겸손은 더 고매하게 빛난다. 선생의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부부간에 톡으로라도 통하니 그나마 다행이나 기왕이면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좋겠다. 그것도 선생처럼 상경여빈(上敬如賓) 하려는 결심과 노력이 요구되지만, 응당 그렇게 해야 한다.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은 지역별 지부장을 두어 선비 교육의 활성화를 기하고 있다. 6월 27일 두 번째 지부장 회의에 3시간 반 정도 소요 시간을 감안하여 늦지 않도록 6시경 나섰다. 너무 일찍 출발했는지 9시 21분 도착하여 한 시간 남짓 여유가 생겼다. 마침 일기 화창하고 바람도 소슬하여 본부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고는 퇴계 명상길 도산재를 걸으려 후문을 나와 주차장을 지나는데 마당에 자그마한 새가 눈에 띈다. 가까이 다가가도 피하지 못하고 입만 할딱거리는 것이 목이 말라 그런가 어린 날개에 힘이 빠졌기 때문인가. 이대로 두면 잠시 후 들이닥칠 차에 치이거나 불볕더위로 탈수 때문에 죽을 것이 뻔하다. 새에게로 다가가는 중 자연과 가까이하고 주변 동물을 벗 삼았던 퇴계 선생의 「도산기(陶山記)」가 떠 오르니 희한하다. '책을 덮고 나가서…. 대에 올라 구름을 바라보거나 낚시터에서 고기를 구경하고 배에서 갈매기와 가까이하면서 마음대로 이리저리 노닐다가 좋은 경치를 만나면 흥취가 절로 일어 한껏 즐기다가 집으로 돌아오면 고요한 방에 책이 가득 쌓여 있어 책상을 마주하여 잠자코 앉아 欣然忘食한다'는 것이다. 가까이에 쪼그려 배가 고프냐 목이 마르냐고 물었다. 내게 機心은 없으니 안심하라며 오른손을 새의 발치에 두니 이 어린 것이 손바닥 위로 살며시 오른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야생 조가 인간의 품에 들겠는가. 자! 물을 먹이려면 인간이 있는 사무실로 가야 할 텐데 얘가 좋아할지 모르겠다. 생각 끝에 2원사 주변의 세 개 정자 가운데 제일 가깝고 녹음 우거진 회우정이 아직 이슬이 남아 있을 것 같아 손바닥에 새를 올린 채 조심조심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이 녀석이 정자 그늘에서 살금살금 사진을 찍어도 손 위에 얌전히 있을뿐더러 오히려 편해 보여 내려놓기가 야멸차다. 그렇게 10여 분을 그늘에 서 있다가 조심스레 평상에 내리고 하회를 본다. 보통 이렇게 꽁지가 긴 새들은 위아래로 꽁지를 흔드는 것이 상례거늘 가만히 있는 모양이 기운이 없긴 없나 보다. 잠시 후 바라던바 아래 풀밭으로 날아가서는 꼬리를 위아래로 올렸다 내리긴 한다만 아직도 날 기미는 없다. 새를 바라보는 중 자연스레 옆 회우정의 편액 내용이 눈에 들어온다. 會友 ―退溪 공문론회우(孔門論會友 공자 문하에서 친구 사귀는 도리는) 이문잉보인(以文仍輔仁 학문을 매개로 하여 어짊을 보하매) 비여시도교(非如市道交 시장 바닥의 사귐과는 다르니) 이진성로인(利盡成路人 이익이 다하면 길거리에 스치는 사람이 된다) 이러고 보니 하필 회우정으로 온 것도 정자에 게시된 선생의 시도 우연이 아닌 듯하여 더 의미 있게 다가온다. 사람이 어질면 새와도 사귈 수 있고 학문 이상의 그 무엇으로도 成仁을 도울 수 있다는 가르침인가? 한참 있다가 기운을 차렸는지 나무 위로 날아가매 그제야 안심하고 발을 돌리는데 아기 새랑 똑같이 생겼으되 몸이 더 큰 새 한 마리가 안내하듯 뒤의 나를 살피며 뿅 뿅 활기차게 걸어 나간다. 이상한 마음에 따라가노라니 30여m를 내려가 2원사 정문 주차장 주변에서 포로롱 동쪽 나무로 날아오른다. 아마도 새끼의 안위가 걱정되어 멀찍이서 살피던 어미 새가 은인인 손님을 주차장에 안내함으로 보답한 듯하다. 거참 희한한 일이요 이 무슨 징조일까 궁금하다. 吉鳥인가 吉兆일까? 어쨌건 이를 계기로 오늘 만나는 전국 지부장과 코로나로 고생이 컸던 우리 수련원 그리고 내게 속한 모든 사람에게 길한 조짐으로 퍼져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새의 사진을 전문가에게 보여 알락할미새임을 알았으며 이렇게 새와도 특별한 만남을 가졌다. 며칠 뒤에 얘기를 들은 단양의 畏友 채 위원은 『명심보감』의 효행 편에 나오는 '효자 都氏가 홍시를 얻도록 도와준 호랑이' 예와 비슷한 아름다운 내용이라 하지만 차라리 퇴계 공부를 한 때문이면 좋겠다. 20220627알락 할미새 - (오피) 김병규(아침) 吉鳥인가 吉兆일까 김병규 전 상당고 교장·교육학박사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은 지역별 지부장을 두어 선비 교육의 활성화를 기하고 있다. 6월 27일 두 번째 지부장 회의에 3시간 반 정도 소요 시간을 감안하여 늦지 않도록 6시경 나섰다. 너무 일찍 출발했는지 9시 21분 도착하여 한 시간 남짓 여유가 생겼다. 마침 일기 화창하고 바람도 소슬하여 본부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고는 퇴계 명상길 도산재를 걸으려 후문을 나와 주차장을 지나는데 마당에 자그마한 새가 눈에 띈다. 가까이 다가가도 피하지 못하고 입만 할딱거리는 것이 목이 말라 그런가 어린 날개에 힘이 빠졌기 때문인가. 이대로 두면 잠시 후 들이닥칠 차에 치이거나 불볕더위로 탈수 때문에 죽을 것이 뻔하다. 새에게로 다가가는 중 자연과 가까이하고 주변 동물을 벗 삼았던 퇴계 선생의 「도산기(陶山記)」가 떠 오르니 희한하다. '책을 덮고 나가서…. 대에 올라 구름을 바라보거나 낚시터에서 고기를 구경하고 배에서 갈매기와 가까이하면서 마음대로 이리저리 노닐다가 좋은 경치를 만나면 흥취가 절로 일어 한껏 즐기다가 집으로 돌아오면 고요한 방에 책이 가득 쌓여 있어 책상을 마주하여 잠자코 앉아 欣然忘食한다'는 것이다. 가까이에 쪼그려 배가 고프냐 목이 마르냐고 물었다. 내게 機心은 없으니 안심하라며 오른손을 새의 발치에 두니 이 어린 것이 손바닥 위로 살며시 오른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야생 조가 인간의 품에 들겠는가. 자! 물을 먹이려면 인간이 있는 사무실로 가야 할 텐데 얘가 좋아할지 모르겠다. 생각 끝에 2원사 주변의 세 개 정자 가운데 제일 가깝고 녹음 우거진 회우정이 아직 이슬이 남아 있을 것 같아 손바닥에 새를 올린 채 조심조심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이 녀석이 정자 그늘에서 살금살금 사진을 찍어도 손 위에 얌전히 있을뿐더러 오히려 편해 보여 내려놓기가 야멸차다. 그렇게 10여 분을 그늘에 서 있다가 조심스레 평상에 내리고 하회를 본다. 보통 이렇게 꽁지가 긴 새들은 위아래로 꽁지를 흔드는 것이 상례거늘 가만히 있는 모양이 기운이 없긴 없나 보다. 잠시 후 바라던바 아래 풀밭으로 날아가서는 꼬리를 위아래로 올렸다 내리긴 한다만 아직도 날 기미는 없다. 새를 바라보는 중 자연스레 옆 회우정의 편액 내용이 눈에 들어온다. 會友 ―退溪 공문론회우(孔門論會友 공자 문하에서 친구 사귀는 도리는) 이문잉보인(以文仍輔仁 학문을 매개로 하여 어짊을 보하매) 비여시도교(非如市道交 시장 바닥의 사귐과는 다르니) 이진성로인(利盡成路人 이익이 다하면 길거리에 스치는 사람이 된다) 이러고 보니 하필 회우정으로 온 것도 정자에 게시된 선생의 시도 우연이 아닌 듯하여 더 의미 있게 다가온다. 사람이 어질면 새와도 사귈 수 있고 학문 이상의 그 무엇으로도 成仁을 도울 수 있다는 가르침인가? 한참 있다가 기운을 차렸는지 나무 위로 날아가매 그제야 안심하고 발을 돌리는데 아기 새랑 똑같이 생겼으되 몸이 더 큰 새 한 마리가 안내하듯 뒤의 나를 살피며 뿅 뿅 활기차게 걸어 나간다. 이상한 마음에 따라가노라니 30여m를 내려가 2원사 정문 주차장 주변에서 포로롱 동쪽 나무로 날아오른다. 아마도 새끼의 안위가 걱정되어 멀찍이서 살피던 어미 새가 은인인 손님을 주차장에 안내함으로 보답한 듯하다. 거참 희한한 일이요 이 무슨 징조일까 궁금하다. 吉鳥인가 吉兆일까? 어쨌건 이를 계기로 오늘 만나는 전국 지부장과 코로나로 고생이 컸던 우리 수련원 그리고 내게 속한 모든 사람에게 길한 조짐으로 퍼져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새의 사진을 전문가에게 보여 알락할미새임을 알았으며 이렇게 새와도 특별한 만남을 가졌다. 며칠 뒤에 얘기를 들은 단양의 畏友 채 위원은 『명심보감』의 효행 편에 나오는 '효자 都氏가 홍시를 얻도록 도와준 호랑이' 예와 비슷한 아름다운 내용이라 하지만 차라리 퇴계 공부를 한 때문이면 좋겠다.
신발장을 열다가 몇 년 동안 위층 선반에서 잠자고 있는 구두들에 눈이 간다. 대학 때 아버님이 고추 팔아 사 주셨던 검정 구두를 시작으로 옷 색깔에 맞춰 들인 덕에 여름 구두까지 도합 5켤레가 고이 모셔져 있다. 대부분 1980년대 중반에 사들였으니 내 발과 함께 한 시간이 어언 35년가량이다. 이 구두들과 전국 곳곳을 누볐는데도 오랜 기간 잘 버텨주어 고맙고 정겹기도 하다. 본디 아버님이 물건과 기계를 꼼꼼하게 잘 챙기심을 보고 배워 내게 속한 물건을 아껴 쓰는 버릇을 들였더니 그리 오래되었어도 구두약을 자주 발라주었기 때문인지 외관도 멀쩡하다. 돌아가신 아버님이 평생을 구두 한 켤레로 지내셨기에 이 못난 아들도 한 켤레로 살려 했는데 어쩌다 보니 겨울 구두는 물론 여름 구두까지 검정과 브라운 계열로 준비하여 신발장이 부족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구두 신을 적마다 아버님께 죄송한 마음이었건만 교육청에 정장 차림으로 출근하면서 그런 미안한 마음도 무디어갔더랬다. 퇴임을 하여 양복 입을 일도 적어 철철이 맞춰 입느라 사들였던 그 많던 남방과 넥타이도 버렸거늘 신발장에 있어 눈에 잘 안 뜨이던 구두가 남아 있었다. 이제 발에 편한 캐주얼화를 신고 다님에 상태가 가장 양호한 구두 한 켤레만 두고 나머지는 죄다 버리기로 작심하였다. 서재에서 먼지만 쓰고 있던 책들을 이미 한 트럭 남짓 실어 보냈고, 옷 버릴 적에 고민도 했거늘 구두쯤이야. 현관 문께 내놓으면서 다른 물건과 함께 치우도록 아내에게 부탁하고 외출했는데 귀가하여 보니 구두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평소 버리는데 과감하여 쇼핑백과 같이 금방 필요한 것도 기를 쓰고 버리는 아내의 눈에도 구두의 상태가 워낙 좋은데다가 혹 소용될 때가 있을 것 같아 버리지를 못하겠더란다. 한 켤레는 예비로 두었으므로 버려도 괜찮다 했건만 벌써 2주간을 구두가 현관에서 신발장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내침을 받지도 못하고 저러고 있다. 버리기가 이리 힘들다. 분명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살날이 길지 않을 터라 생각하니 그동안 아껴 갈무리했던 물건들을 새삼스럽게 바라보게 된다. 우연히 배워 내 인생을 살찌웠던 젓대와 단소 등 대풍류랑 거문고 해금 등 줄풍류, 그리고 뚝심 깊고 꿋꿋이 사들였던 다완과 다탁 등 차 풍류를 나만큼 소중히 여길 사람이 있을까나. 이것들도 서서히 정리할 수순이라 생각하니 처연해진다. 누구 말대로 인생 별거 있나 싶기도 하지만 내게 보람과 기쁨을 주었듯 자식과 손녀들의 삶에 윤활제로 작용할지 또 모를 일이긴 하다. 주자의 시 가운데 '은거하여 무엇을 더 구하리오'라는 말과 퇴계 선생의 자명 중에 '조화를 타고 돌아가니 다시 무엇을 구하리오'라는 내용을 염두에 두어 긴요하지 않거나 손에서 멀어진 것들을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멀쩡한 구두를 소용없다고 치워 버리고는 발에 편한 여름 샌들을 구매하려고 인터넷을 기웃거리니 마땅치 않은 일이요, 오래되어 유행 지난 바지를 정리하자마자 요즘 유행인 바지에 눈독을 들이고 있으니 어울리지 않는다. 구두가 없는 것도 아니고 바지가 부족한 것도 아닌데도 지름신과 또 투쟁하고 있고, 습관처럼 저지르는 충동구매도 이제는 안 하도록 조심해야 하는데 또 되풀이하고 있다. 있는 것으로도 충분하고 앞으로 얼마나 사용할 기약을 예측하기도 어렵거늘 기 십년 사용할만한 두꺼운 통가죽 벨트로 바꾸고 있으니 얼마나 가소로운가. 所用과 豫斷이 구매 시의 긴요 사항임을 알면서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이 어리석음이여! 이참에 살면서 안 좋았던 기억도 버리는 노력을 해야겠다. 내 삶에서 버릴 것들을 색출하려면 응당 操心과 명상이 필요하겠지만 기왕이면 기분 좋은 추억으로 갈무리하는 삶이 좋지 않겠는가. 조심은 잡을 조 마음 심의 속뜻을 갖고 있으니 마음을 잘 잡으면 되렷다. 예전 어른 들이 구방심을 하였듯 물건 구매에 우선 조심하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