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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비

시인·중앙대문예창작학과 박사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내게, 세상은 어김없이 또 선물을 쥐여준다. 그저 감사하다는 말 밖에, 아무리 아름다운 미사여구를 동원한대도 고마운 마음을 표현할 길이 없다. 십여 년 전, 집 뒤란에 조그만 밤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나무를 심으며 "집안에 밤나무를 심으면 안 된다"는 속설이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가을날 밤 몇 알을 줍겠다고 산속으로 발품을 파는 수고를 덜고 싶었던 게으른 마음이 속설을 이겼다. 과실을 좋아하는 탓에, 내친김에 집 주변에 여러 과실수를 함께 심었다. 사과, 배, 살구, 복숭아, 자두, 감에 이르기까지 온갖 종류의 나무를 땅에 묻으며 풍성한 결실을 꿈꿨다.

그러나 정직한 자연 앞에서 나태한 농부의 바구니는 항상 가벼웠다. 농약을 치지 않으니 열매들은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맺혔다가도 어느 순간 떨어져 자취를 감추었다. 결국 수확의 기쁨 대신 '우리 집 마당에는 과실나무가 살고 있다'는 것만을 위로 삼아 계절을 맞이하고 보냈다. 하지만 밤나무만은 달랐다. 묵묵히 서서 고요히 한 겨울을 보내다가도 유월이 오면 진한 향기를 사방으로 풍기며 제 존재를 거침없이 과시했다. 무더운 여름에는 커다란 그늘을 엮어 쉴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고, 소슬한 가을이면 튼실한 열매로 다시 한번 단단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어느새 뒤란이 온통 토실한 알밤과 뾰족한 밤송이들로 빼곡하다. 더러는 바닥에 떨어져서 밤송이와 알밤이 서로 분리되어 있고, 더러는 살짝 벌어진 틈 사이로 윤기 나는 알밤이 새초롬하게 들어앉아 나를 바라본다.

오른쪽 발끝으로 밤송이를 살짝 누르고, 작대기를 그 틈새로 슬며시 밀어 넣어 밤을 쏙 꺼낸다. 손에 쥔 반질반질하고 단단한 열매를 보며 문득 깨닫는다. 이것은 나무의 시간과 기억이 담긴 숭고한 출산이라는 것을. 목련꽃 날리던 따사롭던 봄과 배롱나무 가지 끝에 피던 붉은 여름과 국화 향기 퍼지는 가을을 가득 품은 나무가 튼실한 열매를 낳아 가만히 건네는 선물인 것이다. 바구니 안에 밤을 담아 주방으로 간다. 냄비에 물을 자작하게 붓고 불을 올린다. 한참을 끓인 후 폭신하게 익은 밤을 들고 테라스에 앉아 깨물어 본다. 달콤한 속살이 혀끝을 타고 들어온다.

고대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는 '주기 위해 주는 것'이 진정한 베풂이라고 말한다. 즉 진정한 선물은 대가를 바라지 않는 무조건적인 베풂이라는 것이다. 대가를 지불하거나 무언가 노동을 바친 대가로 얻는 것은 '거래'일 뿐, 선물은 아니다. 내가 자연으로부터 받은 것은 내가 치른 대가의 결과가 아니다. 아무런 대가 없이 내어진 알밤은 자연이 내게 베푼 고귀한 선물의 모습이다.

문득 고개를 들어 나를 둘러싼 세상을 둘러본다. 귀를 적시는 빼곡한 새소리, 처마 밑 풍경을 흔들며 제 모습을 드러내는 바람, 온몸으로 내려앉는 투명한 햇살과 높은 하늘, 멀리 보이는 산속의 이름 모를 나무들과 항상 내 곁을 지켜주는 고마운 사람들까지. 정작 나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보태준 것이 없는데, 해마다 이토록 눈부시고 풍요로운 계절을 거저 누리고 있다. 세네카의 말처럼 가만히 수용하고 감사해할 때 비로소 완성되는 이 가을, 나를 소리 없이 바라봐주고 다정하게 보듬어 주는 세상이 있어 참으로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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