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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26.09.09 16:40:03
  • 최종수정2026.09.10 08:50:00

박명애

수필가

햇볕에 열매들이 익어간다. 여름내 잎사귀에 숨겨 키운 결실들에 자연의 마지막 숨결이 기울여지는 시간이다. 초록 모과에는 노란빛이 감돌고, 대추에는 붉은 물이 들기 시작한다. 꽃 진 자리마다 꼬투리가 맺히는 구월, 오랜만에 뒷동산에 산책을 나서본다. 낯설게도 산자락 입구 풀숲에 코스모스가 마타리를 벗 삼아 피었다. 여름 들꽃이 시드는 자리에는 누가 심었는지 쑥부쟁이와 국화들이 꽃의 시간을 이어가고 있다. 숲은 여전히 초록으로 무성하여 더러는 산책길이 풀에 묻히고, 폭우에 움팬 곳에서 키 작은 풀이 여리게 자라기도 한다. 소나무 등걸에 해먹처럼 걸린 거미줄은 숲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에 눈이 부셨다. 어찌나 촘촘하게 뜨개질을 했는지 사방으로 면적을 넓혀가며 짜낸 솜씨가 경이롭다. 집주인은 어디 가고 거미줄만 살랑살랑 바람을 탄다.

문득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등대로>의 뜨개질하는 램지 부인이 떠오른다. 슬기로우면서도 아름다운 여인, 그녀는 철학자면서도 불안감에 젖어 사는 남편을 보듬어야 했고 매사 가위 자르듯 냉정한 남편으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며 가정을 돌보아야 했다. 자신과 주변 인물들을 거미줄처럼 이어 놓고 도움을 청하는 이웃 사람들까지 완벽하게 품고 가려 했던 그녀는 주변이 흔들리지 않도록 관계된 이들의 삶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안정시키려 애쓰다 갑자기 세상을 떠난다. 가끔은 삶이 덧없고 내가 맡아 하는 일들이 허영은 아닌지 의심하면서도 그녀는 그런 자신의 영역을 놓지 못한다. 그녀가 자기 자신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은 홀로 남겨진 어둠 속에서다. '쐐기 모양을 한 어둠 속에서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되는 것'(등대로). 반듯하게 앉아 뜨개질을 하면서 자유로워진 자아를 느끼던 여인.

램지 부인에 대하여 사람들은 결혼이란 굴레에서 자신을 잃어버린 존재로 바라보기도 하지만 그 여인에게서 나는 어머니를 그리고 떠난 이들을 떠올린다. 저녁 식사 메뉴, 타인에 대한 연민과 창밖의 파도 소리, 그렇게 흘러간 평범한 일상은 남은 이들의 과거와 현재 미래로 소리 없이 흘러 들어가 기억을 형성한다. 그리고 그녀의 죽음으로 당연했던 모든 것들에 무게가 생긴다. 그녀가 희생한 시간들은 남은 이들에게 절망에서 다시 삶의 이정표를 찾아 등대로 걸어갈 기회를 제공한다.

기억이란 때로 왜곡되기도 하지만 누군가 보듬은 따스한 바람이 있어 삶은 이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혼란스런 요즘, 흔들리면서도 끊어지지 않는 거미줄처럼 서로를 따뜻하게 포용하고 연대하는 마음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숲속 나무 등걸에 앉아 지난 시간들을 돌이켜보며 마냥 빈 뜨개질을 한다. 어디를 잇고 어디를 수선해야할까. 소나무 사이로 건너오는 바람이 맑고 까슬하다. 자연의 바람이 내 안을 성숙하게 하는 사유의 바람으로 스며드는 가을. 램지 부인 만큼은 못되지만 조금쯤은 보수적인 여인의 탈을 벗지 못하는 나이기에 어디든 하루 떠나보자는 벗의 유혹에 자아를 핑계로 흔들리는 구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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