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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수필과 함께하는 가을동화 - 그림이 있는 그림자

  • 웹출고시간2026.09.10 15:39:18
  • 최종수정2026.09.10 15:39:18
'그림자'라는 말이 먼 옛날에 '그림'이라는 말에서 생겨났을까. '그림자'는 '그림'이라는 말과 두 자까지는 같고 끝에 '자'자 하나가 더 붙어 있으니 말이다. 여기저기 아무리 찾아보아도 같은 어원이란 말은 없다. 그림과 그림자는 큰집과 작은집 사이도 아니고, 그냥 한 할아버지의 자손도 정도도 아닌가 보다. 그림은 그림이고 그림자는 그림자이니까 처음에 서로 연관이 있는 것처럼 비슷한 이름을 지어 부른 게 잘못이다.

빛이 있어야 그림자가 생긴다. 그림자는 늘 빛에 신세를 많이 진다. 그러나 센 빛이라고 아주 어두운 그림자가 생기지는 않는다. 그림자는 옛날에 전기도 들어오지 않던 시절 초가집에서 잘 생겨났다. 어두운 밤에 등잔불을 켜 놓고 식구들이 도란도란 모여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면 그 그림자가 벽이나 방문에 만들어져서 주인을 흉내 내며 손을 흔들었다. 멀리서 문에 비치는 그림자만 살펴보아도 방에 있는 사람이 무엇을 하는지 반은 들여다보는 셈이었다. 조도가 높은 빛이라고 꼭 그림자가 잘 생기지는 않는다. 부자라고 해서 꼭 잘 베풀지 않는 이치랑 같다. 정이 있어야 콩 반쪽씩이라도 나누어 먹듯이 조건이 맞아야 그림자도 선명하게 맺는다. 큰소리를 치는 사람 중에는 실속이 없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잘 속는다.

어려서는 밤이 되면 등잔불을 켜 놓고 그림자놀이를 많이 했다. 방 하나에 여럿이 모여 놀면 더 재미가 있다. 3학년 자연 시간에 '빛의 직진'을 공부하며 그림자를 배웠다. 동생들에게 한 손으로 멋들어진 그림자를 신기하게 만들어 보였다. 종이를 오려서 손등에 붙이고 새, 낙타, 캥거루를 만들었고 손바닥을 움직이며 두 날개로 날아가는 나비도 만들었다. 등잔에 가까이 손을 가져가면 그림자는 벽만큼 커진다. 큰 그림자를 만들어 동생들의 그림자를 지우는 심술도 부렸다.

'풀꽃 시인' 나태주는 부인과 시를 주고받았다.

'한 남자의 아내로서 / 그림자로 살았고 /

두 아이 엄마로서 울면서 기도하는 능력밖엔 없었던 여자이지요.' 라고 나태주가 부인을 일러 노래할 때, 아내는 남편에게

'저 남자는 젊어서부터 / 분필과 함께, 몽당연필과 함께 산 시골 초등학교 선생이었 어요. / 시에 대한 꿈 하나만으로 / 염소와 노을과 풀꽃만 / 욕심내 온 남자예요.' 라고 화답을 하였다.

서로의 진솔하고 고마워하는 모습이 보인다. 서로 비추어 만들어 내는 부부의 두 그림자에서 소박한 사랑이 뭉클하게 보인다. 그림자에는 사랑도 박혀 있다.

올해 여름은 유난히도 더웠다. 집 안에서는 꼭 에어컨을 틀어야 했고 야외로 나설 때는 두껍고 시원한 그늘만 찾게 되었다. 친구들과 보은군 회인에 있는 구룡산 골짜기로 피서를 다녀왔다. 골짜기를 흐르는 시원한 물에 발을 담그면 허벅지까지 소름이 돋는 듯했고 오래 견디기가 어려웠다. 얼음계곡 같았다. 워낙에 큰 산이 양쪽에 있어서 가운데 골짜기 전체가 컴컴할 정도로 어두웠다. 나무 그늘은 나무의 그림자이다. 골짜기의 아기 단풍나무는 그림자가 없다. 큰 산의 그림자가 작은 그림자를 모두 삼켰다. 그늘이 두꺼운 걸 보면 그림자도 겹치면 더 어두워지나 보다. 밤도 따지고 보면 지구의 커다란 그림자이다. 그래서 초저녁이나 새벽보다 한밤중이 더 어둡다. 두꺼운 어둠은 더위도 숨기는 재주가 있다. 두꺼운 그림자에는 큰 산, 작은 산, 고라니 또 많은 나무의 그림도 새겨져 있다.

'물취이모(勿取以貌)'란 말이 있다. 외모(外貌)만으로 그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는 뜻이다. 어느 정승이 누추한 옷을 밉고 잔칫집에 들어서려다 대문에서 문전박대를 당했다. 다시 나와서 사모관대를 갖춰 입고 그 집을 찾았다. 주인이 버선발로 달려 나와서 그를 맞이하고는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산해진미(山海珍味)로 대접했다. 정승은 차려진 음식을 먹지 않고 옷소매 속으로 잔뜩 집어넣는 게 아닌가? ​이를 본 주인이 이상하게 여겨 "왜 이러시냐?"고 물었다. 융숭한 대접을 받는 건 이 옷 덕택이니 음식을 먹을 자격은 이 옷이 있는 것 아니요"라고 했단다. 인품을 볼 줄 알아야 한다. 혼자 생기는 그림자는 없다. 그림자는 본래의 그림을 담고 있다.

그림자 속에는 글의 주인을 따라서 황톳길을 걷는 나그네도, 청포를 입은 귀한 손님도, 진달래꽃을 아름 따다가 뿌려주는 임도 다 들어있다.

그림자에는 그림이 깊게 숨어있다. 숨겨두고 들춰내지 않는다. 자세히 보면 보인다. 눈을 감으면 잘 보인다. 마음을 주면 더 잘 볼 수 있다. 세월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고 더 선명하게 나타나 보인다.

그림자에서 세상만사의 그림을 본다.

이평균

전) 충북교육청 장학관. 전) 초등학교 교장

전) 교육과학연구원 원장 전)청주교육대학교 겸임교수

충북대 평생교육원 수필반 수강중

효동문학상(2025). 푸른솔문학회 까페문학상 당선(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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