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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26.09.07 14:47:05
  • 최종수정2026.09.07 14:47:04

김혜식

수필가

젊은 날, 가장 좋은 선물로 '펜과 백지'를 꼽았었다. 백지의 경우, 그 여백이 마치 스펀지처럼 나의 심연을 한껏 흡수할 것 같은 착각에 의해서였다.

심지어 백지를 마주하면 괜스레 가슴이 설레기도 하였다. 이는 별스러운 감정이라 말할 수 있다. 또한 누군가로부터 펜을 선물 받으면 무엇보다 그것의 잉크를 필사(筆寫)에 몽땅 소진(消盡) 했다. 처음엔 외국의 유명 시인의 시를 백지에 빼곡하게 옮겨 적었다. 나중에는 한국 문단에 발표된 좋은 시들에게도 시선을 돌렸다.

그때 선택한 첫 작품은 한용운의 작품인 시 「이별은 미의 창조」였다. '이별은 미(美)의 창조입니다./ 이별의 미는 아침의 바탕(質) 없는 황금과 밤의 올(絲) 없는 검은 비단과 죽음 없는 영원(永遠)의 생명(生命)과 시들지 않는 하늘의 푸른 꽃에도 없습니다./ 님이여, 이별이 아니면 나는 눈물에서 죽었다가 웃음에서 다시 살아날 수가 없습니다. 오오 이별이여,/미는 이별의 창조(創造)입니다.'라는 시의 시어를 한 자 한 자 백지에 필사 했었다. 한용운이 그의 시에서 시적 주제인 임과 행한 이별의 슬픔을 철학적  형이상학적으로 승화 시켰음을 깨닫게 된 것도 필사가 안겨준 힘이었다. 평소 이 시를 대할 때는 이러한 작품에 대한 별다른 해석도 없이 마냥 읊조리기만 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지에 필사를 하노라니 이 시가 지닌 표현의 특징역시 쉽사리 체득할 수 있었다. 이 시는 문법 구조 면에서 수사적으로 매우 특이 하다. 반복 구조로 형성 된 게 그것이다. 특히 처음과 끝 행의 수미 쌍관적 반복 구조를 엿볼 수 있어서 매우 인상적이다. 이러한 수사법은 이 시 3행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다. 3행에서 영탄법과 대조적인 대구법으로 반복 표현된 화자의 이별에 대한 찬미는 이 시의 내재율 및 심상과 의미 구조에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하겠다.

무엇보다 '이별'은 얼마나 견디기 힘든 일인가. 더구나 사랑하는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곁을 떠나면 지난날 애틋한 사랑의 흔적이 깡그리 사라졌다는 의미 아니던가. 그럼에도 시적 화자는 고통의 이별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했다고나 할까? 또한 이 시의 시적 화자가 이별을 결코 부정적으로 바라보지 않았다는 점이 이 시의 핵심임을 새삼 발견하기도 했다. 이는 이별의 눈물을 미학으로 승화 시킨 '미는 이별의 창조입니다' 라는 역설적인 표현에 의해서이다.

사실 이러한 시의 문법적 구조와 내재된 감흥은 본격적으로 백지에 시어를 필사하기 전엔 미처 느끼지 못했었다. 이로보아 백지는 문인들이 토로한 사유와 관조, 통찰 등을 무한히 품을 수 있는 바다나 다름없다. 또한 펜은 이것 위에서 문향 진동한 문학 작품들로 만선(滿船)을 이룬 사고(思考)의 배를 유유자적 노 젓게 해주고 있다.

이렇듯 백지는 필자에게 이미 어미 품을 벗어난 한 마리 새와 같은 문학 작품들을 무한정 포옹하고 맘껏 향유할 수 있는 우주와 같은 너른 품새를 장만해 주었다. 뿐만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 백지와 펜 만, 주어지면 세사만반(世事萬般)에 부딪친 체험을 한 편의 글로 꾸릴 수도 있잖은가. 그래서 오늘도 펜을 잡고 백지 위에서 힘껏 노를 저으련다. 이는 필사(筆寫)가 안겨주는 문학의 묘미(妙味)에 심취하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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