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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우의 그림이야기 - 몸은 불편했지만 어머니를 잘 만난 화가 로트렉

  • 웹출고시간2026.09.02 14:47:11
  • 최종수정2026.09.02 14:47:11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 La Comtesse Adèle de Toulouse-Lautrec dans le salon du château de Malromé <말로메 성 응접실의 아델 드 툴루즈 로트렉 백작부인>, 1887년, 캔버스에 유채, 59 x 54 cm, 툴르즈 로트렉 미술관 © Musée Toulouse-Lautrec, Albi, France

ⓒ 뉴시스
프랑스 화가 로트렉(1864~1901)은 19세기 말에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고, 퇴폐적인 상황에서 대중적인 예술 작품을 만들어 낸 것으로 유명하다.

아버지로부터 백작이라는 작위를 물려받을 정도로 금수저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뼈가 약했던 그는 14살에 의자에서 떨어지는 사고로 다리의 성장이 멈춰 버리는 장애를 갖게 된다. 엄청난 단신이었는데 신장이 142cm였다는 설이 있을 정도였다.

이렇게 로트렉이 선천적으로 뼈가 약한 것은 가문의 근친교배 이력에 기인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로트렉의 부모는 사촌 관계였다고 한다. 다시 쉽게 말해 로트렉의 친할머니와 외할머니는 친자매였다는 것이다. 서양의 왕족과 귀족들은 순수혈통을 지키는 방법으로 근친 간 결혼을 많이 했다. 이에 대해 조물주는 유전병을 줘 경고했지만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에 비해 우리나라는 동성동본끼리도 결혼을 허용하지 않아 세계에서 가장 머리가 좋은 종족이 됐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의 아버지는 장애인 아들을 어렸을 때부터 없는 아들 취급했고 이로 인해 어린 로트렉은 마음 고생이 심했다. 어머니와 달리 아들을 무시했던 아버지는 아들의 그림들을 태워 버리기까지 했다. 당연히 로트렉은 이런 아버지를 증오했고 대화도 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어머니와는 관계가 매우 좋았다.

로트렉의 어머니는 큰 꿈을 가지고 있었다. 아들을 유명화가로 만들기 위해 당시 파리에서 잘 나가는 화가였던 레옹 보나(1833~1922)의 스튜디오에서 그림공부를 하게 한다. 로트렉이 화가가 되는 과정을 보면 생각나는 우리나라 화가가 있다. 그는 운보 김기창(1913~2001)이다. 초등학교때 운보가 열병을 앓고 농아가 되자 아버지는 덩치가 큰 운보를 목수를 시키려고 했고, 운보의 어머니는 미술적 재능을 살려주고자 이당 김은호(1892~1979)에게 데리고 가 미술을 배우게 해 한국화의 거장으로 만들었다.

로트렉은 술을 가까이 하면서 매춘부들을 자주 찾았다. 그는 사창가들의 생활 방식과 도시의 하류층의 생활 방식에 매료돼, 이들을 화폭에 담았다. 로트렉은 단신에 기괴한 외모로 인해 자신의 계급으로부터 단절된 귀족으로서, 자신의 운명에 굴복하기에는 너무 자존심이 강했다. 그는 자신의 상태와 매춘부의 도덕적 빈곤 사이에서 친밀감을 발견한 것이다.

이와 같은 도시 하층 계급 여성들에 대한 그의 지대한 관심을 놓고 훗날 앙리의 동료 에두아르 비야르(1868~1940)는 "귀족적인 정신을 갖췄지만 신체에 결함이 있던 그에게 신체는 멀쩡했지만 도덕적으로 타락한 매춘부들에게서 묘한 동질감을 느꼈을 것이다."라고 뒷받침하는 얘기를 했다.

그는 이들의 삶에서 영감을 받아 지금 미술관에 걸려 우리가 보고 있는 약 100점의 드로잉과 50점의 그림을 제작했다.

1889년 물랭 루주 카바레가 문을 열었을 때, 로트렉은 일련의 포스터 제작을 의뢰받았다. 포스터 제작을 통해 생계에 큰 도움을 받았던 것이다. 권위적인 다른 예술가들은 로트렉의 이런 작업을 경멸했지만 그는 그들을 무시했다. 카바레는 그를 위한 자리를 마련해주고 그의 그림들을 전시해주었다.

로트렉은 화려한 밤문화의 색채와 움직임은 그대로 살리면서도 화려함은 걷어낸 채, 사람들을 묘사하는 데 탁월했다. 그는 각 인물이 매우 개성적으로 표현된 군중 장면을 그리는 데 재능을 보였다.

로트렉은 작은 키와 신체적 외모 때문에 조롱받았는데, 일부 전기 작가들은 이 때문에 그가 알코올에 중독됐다고 추측한다.

처음에는 맥주와 와인만 마시다가 점차 압생트와 같은 독주로 가까이 한다. 걷는 것이 불편해 지팡이에 의지했는데, 이 지팡이 속에 술을 채워 넣고 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이런 생활을 지속하다가 결국 1899년 로트렉의 알코올 중독으로 탈진해 쓰러진다. 그의 가족은 그를 요양원에 입원시킨다. 요양원에 있는 동안 그는 서커스와 관련된 그림 39점을 그리기도 한다. 퇴원 후 알코올 중독과 매독으로 인해 그의 신체적, 정신적 건강은 악화되기 시작한다.

뇌졸중으로 다리 아래로 마비돼 휠체어를 사용할 정도로 악화되다 1901년 36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아들의 침대 위에서 파리를 잡으려던 그의 아버지에게 한 작별 인사가 이 세상에서 남긴 마지막 말이라고 한다. 로트렉의 마지막 말은 "늙은 바보(Le vieux con)!" 였다고 전해진다.

로트렉의 사망 후,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작품을 널리 알리는데 애쓴다.

무명화가 고흐(1853~1890)를 세계적인 화가를 만든 것은 동생 태호의 부인 요반 고흐 봉어르(1862~1925)였듯이 로트렉을 유명화가로 만든 것은 어머니 아델(1841~1930)이라고 볼 수 있다. 로트렉의 그림을 높이 평가하던 그림상 모리스 조이앵(1864~1930)은 로트렉 미술관을 세웠는데, 여기에 많은 돈을 낸 사람은 로트렉의 어머니였다. 죽은 아들의 작품을 알리고자 최선을 다한 것이다. 로트렉은 유명작가가 갖춰야 할 3대 요소인 전설, 신화, 요절 외에도 치맛바람이 쎄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어머니가 곁에 있었던 복을 많이 받은 화가였다.

운보와 로트렉을 유명화가로 만든 것은 어머니들이다.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

이동우

미술관장·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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