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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비

시인·중앙대문예창작학과 박사

엘리베이터를 누르다가 퍼뜩 우산을 떠 올린다. 가을장마라고 했다. 잠시 소강상태이지만 언제 또 비가 내릴지 모르는 일, 다시 현관을 밀고 들어가 우산을 챙긴다. 아침 풍경을 눈에 담으며 걷는 길, 바람이 제법 선선하다. 영운천교에 멈춰 잠시 하루를 생각하다 발 아래에 시선을 준다. 다리의 콘크리트 바닥과 난간을 연결하는 작은 틈새에 자리 잡은 풀들이 나를 보며 손을 흔든다. 지난여름 동안 꼿꼿이 고개를 들고 살랑대던 강아지풀도 어느새 누렇게 익어 땅을 보고 있다. 야윈 풀 사이로 누군가 버리고 간 과자봉지와 담배꽁초들이 즐비하다. 다리 방호울타리를 잡고 아래를 본다. 실뱀 같던 영운천이 비에 불어 제법 강줄기 같다. 물줄기 옆으로 풀들이 삐죽이 서 있고, 천의 둔덕엔 팔을 벌리고 선 벚나무가 흔들린다. 그사이에 가녀린 매꽃이 수줍게 피어있다. 가을이 오고 있다. 이제 곧 살살이 꽃도 피어나리라.


바람만 드나드는 시골집 뒤란에

고개 내민 풀씨들을 껴안고 있는 감나무,

말없이 미소 지으며 보듬어주던 당신 같네


삐딱하게 기대 서 있는 오빠 닮은 장대

엎어진 붉은 대야는 책상 위 언니의 뒷등

모두가 나무 아래서 햇살을 받고 있네


살살이꽃 보면서 옅은 미소 짓던 당신

바람이 건듯 불어 허공에 눈을 줄 때

고요의 흘수선을 치고 직박구리 날아가네


* 어떤 대상을 그리워하거나 아쉬워하다

김나비 「기루다」* 전문


이제 나의 계절도 가을빛이 완연하다. 뜨거웠던 계절의 결실인 씨를 품고 고개 숙인 강아지풀처럼 조용히 바람에 나를 맡기며 흔들리되, 어느 쪽으로도 기울거나 꺾이지 않는 자세가 필요하겠다. 예전에는 어른들이 주는 지혜와 지식을 받으며 나이는 고스톱 쳐서 따는 게 아니라는 말을 믿었었다. 그러나 요즘은 과학의 발달과 정보의 홍수로 나이 먹은 사람이 젊은이에게 전달해 줄 지식이 많지 않다. 언제고 컴퓨터기기를 누르면 다양한 지식들이 쏟아지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요즘 젊은이들이 어른을 대하는 태도도 사뭇 달라졌다. 뭔가를 알려주려고 하거나, 잘못된 것을 바로 잡아 주려고 하면 "지금 저를 혼내시는 거에요?"라며 불쾌한 표정을 한다. 참 쓸쓸한 계절이다. 천변의 바람을 맞으며 고요히 그 자리를 지키는 풀처럼 침묵하며 잘 익어가야 하리라. 문득 칠 남매를 키우며 묵묵히 미소만 지으시던, 영원한 나의 어른인 엄마가 그리워지는 날이다. 어쩌면 예전의 나를 보던 어른들도 지금의 나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참 고얀 젊은이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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