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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26.08.27 14:06:11
  • 최종수정2026.08.27 14:06:11

김병규

전 상당고 교장

아내가 취미로 탕카(Thangka)를 그리겠다기에 불교와 가까워지겠다 예상했더니 역시 지도 스님과 대하는 시간과 함께 불교에 관한 관심도 깊어진다. 그러더니 스님의 권고인 듯 몇 달 전부터 같이 가보자고 조르는 절이 생겼다. 유학 분야를 전공한 필자는 천주교 신자임에도 차 마시는 스님들과 친분을 맺고 있어 스스로 3교 통합 운동에 일익을 담당한다고 여기는 터였다. 게다가 그 절은 나랑도 맞는다니 인연이 닿는가 보다.

연일 30˚를 훌쩍 넘어 한증막보다 더한 7월 중순께 드디어 지리산 자락의 그 선원으로 출발했다. 소홀한 준비 탓일까, 인연 때문일까? 고즈넉한 그곳을 제대로 만끽하지 못하고 돌아온 듯함이 꽉 채우지 못한 물항아리를 보는 마음처럼 미진했다. 한 주 후 금요일 새벽 재탐방에 나섰다. 이번에는 사찰이 품고 있는 역사적 설화 및 소유 보물까지도 살펴 사전 공부도 넉넉히 했다. 일주문 옆 산자락의 '명상의 길'을 조금 오르니 천비연로(天飛淵路) 설화를 간직한 연못이다. 못 가 바위에 앉아 단소 한 곡조를 날리는데 가까이 잉어 떼가 모여들어 떠날 줄을 모른다. 나도 바야흐로 동물들과 음악으로 소통을 한다. 고승들처럼.

죽통 따라 흐르는 물을 텀블러에 담고는 문 활짝 열린 설선당의 관음보살 앞에 가부좌 틀고 앉아 명상했다. 일흔도 훌쩍 넘은 이제야 일을 놓은 백수에게 '조정의 천종록을 받는 부귀영화가 소나무 창 아래서 반나절 조는 것만도 못하다'라는 주련 글귀가 새록새록 들어온다.

한참 명상 후 개운한 기분으로 나오는데 마침 점심 공양 마친 스님들이 산책하기에 뒤따라 걸었다. 녹음 짙어 어두운 숲길로 접어드는 스님들을 그대로 따르기엔 얼핏 봐도 외부인에 허용된 곳이 아닌 듯하여 사립문 밖에서 그늘 깊은 산길을 눈으로만 좇았다. 대학 시절 답사 때는 '외부인 출입 금지' 팻말을 무시하고 무상 출입했었지만, 지금은 예의를 배웠거늘 안 될 일이다.

삼삼오오 스님들이 우리를 지나치고는 후미에 스님 두 분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걸어 나온다. 우리 부부가 목례를 드리자 경내의 볼거리들을 다 보았는가 일일이 확인하더니 몇 걸음 더 걷다가 우리를 돌아보며 괜찮으면 차 한잔하잔다. 이 얼마나 고마운 말씀인가! 감히 청할 수는 없어도 바라던 바이다(不敢請 固所願).

선방으로 들어서니 다탁과 다반, 다구들이 정갈하다. 동쪽 문으로는 하얀 수국과 푸른 대나무로 에워 쌓인 요사채가 펼쳐있고, 서쪽 문으로는 뭉게구름을 머리에 이고 있는 지리산 토끼봉이 완연하다. 두 개의 문으로 들이는 풍경이 사뭇 다른데 차경문화(借景文化)의 진수가 드러난다. 아래 지경의 속세는 불가마인데 산속 선방은 고작 방문 두 개 열어 놓았는데도 가을날처럼 선선하다.

대개 스님들의 차 수준이 높아서 은근 궁금한데 팽주 東曉 스님이 10년산 맹송고수 산차를 서슴없이 내신다. 예전 구인사에서 스님이 명차 한 됫박 퍼 주셨을 때처럼 놀랐다. 오늘 귀한 차에 입이 호강하겠다.

청주에서 왔다는 말에 속리산이 아늑하다 하시는 東曉 스님을 이어, 옆에 正滿 스님은 법주사에서 두 번 살았다고 하시니 만남의 인연이 있다.

평소 낯을 가리는 아내가 탕카 때문에 스님과 친분이 있다는 말을 스스럼없이 하게 되었을 때다.

정만 스님께서 "인간의 자아는 고요 상태일 때 힘을 못 쓰게 된다, 고요함을 알아야 자기도 살필 수 있고 깨달음의 기회도 생기게 되는 거다"며 정숙의 의미를 강조하신다. 가만히 깨달음의 순서를 살피니 聽聞, 省察, 解脫의 순인데 사람들은 이를 모르고 있단다. 또한 큰 산에 들어야 자연과 더 가까워질 수 있더라는 스님의 경험담도 내신다.

차가 계속 우려지고 잔 빌세라 찻잔을 채워 방 안에 차향이 그윽한데, 내공 깊은 스님과의 차담 삼매경에 해가 뉘엿뉘엿 기운 줄도 모르겠다. 재방문한 보람으로 입과 귀 그리고 마음도 즐거운 하루가 되었다. 이렇게 인연이 또 쌓인다.

아뿔싸, 토끼봉 자락 휘돌아 내려온 지리산 바람 님도 슬그머니 동석하고 있었네!

탕카(Thangka)

전통적으로 깨달음을 추구하며 명상하는 도구이자 불교의 가르침을 담은 그림인 티베트 불화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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