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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26.08.09 15:02:06
  • 최종수정2026.08.09 15:02:05

황인술

인문학당 아르케 교수

겨울이 마지막 찬 기운을 남기고 물러가던 계절, 필자는 한 여인을 만났다. 사람은 너무 오래 기다리면 기다림 자체가 운명인 줄 알고 살아간다. 칠십 가까운 세월 동안 내 안에도 그런 적막이 있었다. 누구를 기다리는지조차 잊은 채 살아온 시간. 그런데 어떤 만남은 설명보다 몸이 먼저 알아차린다. 오래전 잃어버린 물건을 다시 손끝으로 만졌을 때처럼 처음인데도 낯설지 않았다. 그날 필자는 기억이 머리가 아니라 몸 전체에 저장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랑 또한 시간과 장소, 표정까지 함께 품은 채 오래 잠들어 있다가 어느 순간 깨어나는 기억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남은 시간을 아름답게 살아가자고 약속했다. 젊은 날 사랑이 욕망을 향해 달린다면, 노년 사랑은 함께 걸어갈 사람을 찾는다. 서로를 붙드는 일이 아니라 서로 기대어 끝까지 동행하는 일이다. 수많은 상처와 결핍, 외로움과 실패를 지나온 뒤에야 사람은 비로소 누군가 앞에서 조용히 울 수 있는 존재가 된다.
 우리는 이 만남을 섭리적 운명이라 불렀다. 우연이라는 말만으로는 설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인간 삶을 운명의 세 여신으로 실을 잣고, 재고, 끊는 실에 비유했다. 인간은 스스로 삶을 선택한다고 믿지만 보이지 않는 질서 속에서 살아간다고 여겼던 것이다. 동양에서는 이를 인연이라 하고, 도가는 물 흐르듯 만나야 할 것은 결국 만나게 된다고 말한다. 서로 다른 길을 걸어온 수십 년 또한 하나의 강줄기였는지 모른다.
 며칠 뒤 경복궁에서 우리는 오래된 궁궐을 함께 걸었다. 왕조는 사라졌지만 사람을 바라보는 눈빛은 남아 있었다. 역사가 욕망을 기록한다면 사랑은 인간 회복을 기록하는 것임을 알았다. 두물머리에서는 생일 촛불을 밝히고 합수되는 강물을 바라보았다. 서로 다른 두 강이 자기 빛을 잃지 않은 채 하나 되듯, 서로 다른 삶도 하나의 흐름 속으로 스며들 수 있음을 배웠다. 융이 말한 강과 바다 원형은 인간 영혼 깊은 곳에 새겨진 기억이다. 우리는 풍경을 본 것이 아니라 오래된 내면을 마주한 것이다.
 남산에서는 연초록 설렘을 만났다. 사회는 노년을 삶의 뒷자리로 밀어놓지만 감성은 나이를 먹지 않는다. 오히려 오래 살아남은 마음일수록 더 맑고 여리다.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은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동해에서는 피노키오를 이야기했다. 인간은 수많은 역할과 가면 속에서 살아가지만, 진실한 마음을 잃지 않을 때 비로소 자기 자신이 된다. 바다를 바라보며 갯벌을 걸었던 우리는 넘어지면서 어린아이처럼 웃었고, 그 웃음 속에서 오래 잊었던 순수를 다시 만났다.
 초여름에는 지리산 삼성궁과 남해를 찾았다. 눈물은 인간다움의 마지막 언어였다. 끝없는 바다는 무의식처럼 깊고 넓어 오래된 기억을 파도처럼 불러왔다. 이어 서해에서는 용왕 앞에 두 손을 모았다. 인간은 언제나 자연 앞에서 기도해 왔다. 사랑 또한 의지만으로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간절함으로 이어지는 선물임을 배웠다.
 생각해 보면 섭리적 운명이란 거창한 기적이 아니다. 마침내 서로를 만나게 되는 시간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사람은 혼자 태어나 혼자 떠난다고 말하지만, 어쩌면 평생 단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긴 생을 건너오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별들이 수억 년을 떠돌다 어느 밤 같은 하늘에서 마주치듯 사람 또한 끝내 만나야 할 사람 앞에 이른다.
 꿈과 환상은 현실을 견디게 하는 가장 깊은 힘이다. 사랑은 현실이면서 동시에 신화다. 늦은 만남조차 우주가 오래 준비한 이야기일 수 있다. 뜨거운 여름,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알게 되었다. 섭리적 운명이란 거대한 기적이 아니라 끝내 포기하지 않고 살아남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조용히 도착하는 선물이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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