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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26.08.06 14:14:08
  • 최종수정2026.08.06 14:14:08

김춘자

수필가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장대비가 세차게 쏟아졌다. 앞도 잘 보이지 않는 빗길을 뚫고 농막으로 향했다.


마당 한 켠에서 파르르 떨고 있는 단감나무가 보였다. 평소 같으면 푸른 잎을 당당하게 펼치고 서 있어야 할 녀석이 허리가 꺾인 채 비를 맞고 있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우산도 팽개친 채 나무 앞으로 달려갔다. 여름날 거센 태풍이 몰아칠 때면 행여 연약한 가지가 다칠세라 천막을 쳐서 바람길을 막아 주었고, 살을 에는 듯한 한겨울에는 볏짚을 얻어와 밑동부터 따스하게 감싸 주며 애지중지하던 나무였다.


 작년까지만 해도 고작 세 개의 감을 수줍게 매달아 내놓던 녀석이었다. 그런데 올해는 무슨 심술인지, 아니면 주인에게 보답이라도 하고 싶었던 것인지 봄부터 노란 감꽃을 흐드러지게 피워내더니 가지가 휘어지도록 청청한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았다.


매주 농막에 올 때마다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장마가 오기 전 손가락을 꼽아가며 세어본 단감은 무려 쉰 개가 넘었었다. 보석처럼 빛나는 열매들을 바라보며 올가을에 맞이할 주황빛 풍요로움을 혼자 상상하곤 했었다.


하지만 너무 과한 욕심이었을까. 단감나무는 제 몸집보다 무거운 열매의 무게와 장대비의 하중을 끝내 이기지 못하고, 뚝 하고 허리가 부러져 버린 것이다. 생채기가 드러난 부러진 단면을 바라보고 있으니 눈시울이 시려 왔다.


 인간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사람은 평생 자식에게 좋은 것을 입히고, 맛있는 것을 먹이고, 편안한 곳에 재워주느라 어깨 위에 삶의 모든 무게를 가득 짊어지고 살아간다. 자식이라는 열매가 탐스럽게 열릴수록 부모의 어깨는 더 무거워지지만, 그 짐이 아무리 무거워도 묵묵히 폭풍우를 버텨낸다.


그러다 세월이 흘러 흰머리가 내려앉고 노쇠해져서야 비로소 깨닫는다. 평생 짊어져 온 무거운 삶의 무게들이 사지육신 마디마디에 고스란히 통증으로 내려앉아 있음을 말이다. 골다공증으로 구멍이 숭숭 뚫린 뼈마디 사이로 시린 겨울바람이 쌩쌩 스쳐 지나갈 때야 비로소 내 몸이 골병들어 있음을 알아채는 미련한 존재가 우리 인간들이다.


어디 육체의 무게뿐이랴. 가진 것을 잃을까 두려워서, 혹은 남들에게 뒤처질까 무서워서 손에 쥔 것을 내려놓지 못한 채, 자신을 갉아먹으며 끙끙 앓는 것이 우리 인간의 서글픈 자화상이다.


 처참하게 부러진 나무의 안간힘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녀석의 결단에는 주저함이 없었던 것 같다. 무거워진 육신의 골병 대신, 단숨에 자신의 허리를 잘라내는 용기는 도대체 어디에 숨어 있었을까.


그것은 삶을 포기한 처참한 패배가 아니었다. 부러진 가지 끝에 아직 매달려 있는 몇 알의 남은 감들이라도 살려내기 위한 나무만의 눈물겨운 '지혜'이자 위대한 결단이었다. 모든 열매를 다 짊어지려다 뿌리째 뽑히는 비극 대신 과감히 자신을 부러뜨려 가장 소중한 본질과 생명을 지키겠다는 침묵의 선언 같았다.


비로소 나무의 꺾인 허리가 처량한 상처가 아니라 거룩한 흉터로 보이기 시작했다. 평생 손에 쥔 무거운 욕심의 짐을 내려놓지 못해 스스로 부서져 가는 사람들에게, 때로는 비워내고 꺾어야만 비로소 죽지 않고 다음 계절을 맞이할 수 있다는 엄숙한 교훈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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