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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준호

수필가

며칠 전 우연히 아파트 정원에 들렀다가 땅에 떨어진 어린 감들을 보았다. 오래된 감나무 아래에 아직 여물지 못한 작고 푸른 감들이 제법 많이 흩어져 있었다. 무심코 지나치려다 그 모습에 발길을 멈추었다. 어떤 것은 꼭지가 붙은 채였고 어떤 것은 흙 위에 눌려 있었다. 대수롭지 않게 지나칠 수도 있는 풍경이었지만 그날은 이상하게 눈길이 오래 머물렀다.

처음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처도 없어 보이는 저 열매들이 그대로 붙어 있었다면 가을쯤에는 제법 탐스러운 감이 되었을 텐데 싶었다. 아파트 정원의 감나무는 방치된 나무도 아니다. 관리사무소에서 때가 되면 가지도 쳐 주고 농약도 치고 거름도 준다. 그런데도 나무는 제 열매를 다 품지 못하고 있었다. 사람의 손길이 닿아도 나무가 스스로 감당해야 할 몫은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감나무의 낙과는 자연스러운 생리 현상이라고 한다. 꽃이 핀 뒤 제대로 수정되지 않은 열매가 떨어지기도 하고, 수정이 된 뒤에도 양분을 충분히 받지 못한 어린 열매가 떨어지기도 한다. 장마와 더위가 이어지는 시기에도 낙과가 생기고, 수확을 앞둔 때까지도 열매가 떨어지는 일이 있다고 한다. 나무가 약해서만은 아니다. 제 몸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을 남기기 위해 스스로 조절하는 과정이다. 알고 나니 감나무 아래 떨어진 열매들이 달리 보였다. 실패한 열매라기보다 남은 열매를 풍성하게 익히기 위해 스스로 조절한 것이었다. 이 과정은 가을까지 이어진다고 한다. 꽃이 진 뒤에도, 어린 열매가 맺힌 뒤에도, 장마를 지나면서도 그때그때 형편을 살피며 열매를 떨구는 것이다. 살아 있는 것은 그렇게 계절마다 자신을 조절하는가 보다.

생각해 보면 내 삶의 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유년기에는 제 마음대로만 하려는 마음을 조금씩 내려놓으며 지냈다. 청년기에는 세상의 모든 길을 다 갈 수 없다는 사실을 배우며 살아왔다. 장년기에는 일과 책임과 사람과의 관계를 한꺼번에 붙들고 버티다가 어느 순간 다 품고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스로 결정한 것도 있고 원하지 않았지만 내려놓은 것도 많았다. 이제는 노년의 문턱에서 또 한 번의 낙과를 생각하게 된다. 젊을 때는 많이 맺는 것이 좋은 줄 알았다. 일이 많고 만나는 사람이 많고 해야 할 역할이 많으면 그것이 열심히 사는 삶이고 의미 있는 삶인 줄 여겼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많이 달고 있는 것이 반드시 풍성한 삶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끝까지 익힐 수 없는 것들을 붙들고 있느라 정작 소중한 것들이 부실해질 때도 있었다.

앞으로 내가 떨구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 지나간 일에 대한 미련일 수도 있고, 아직도 혹처럼 붙어 있는 욕심일 수도 있다. 내려놓는다는 말이 곧 포기라는 뜻은 아닐 것이다. 감나무가 열매를 버리기 위해 떨구는 것이 아니라 남은 열매를 익히기 위해 떨구듯, 남은 삶을 제대로 익히기 위해 덜어내야 할 것이 있다. 더 많이 품는 것보다 끝까지 익힐 수 있는 것을 남기는 일, 감나무는 그 단순한 이치를 어린 감 하나를 또 툭 떨어뜨리며 알려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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