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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26.07.21 14:21:48
  • 최종수정2026.07.21 14:21:48

이정민

청주시청 도시계획상임기획단·공학박사

어떤 작품은 문장이 좋아 자꾸 밑줄을 긋게 되고, 어떤 작품은 하나의 유기체 같은 단단함으로 전문을 필사하게 한다. 그리고 어떤 작품은 책장을 덮는 순간, 여행 가방 하나 꾸리지 않았는데도 먼 곳을 다녀온 사람으로 만들어 놓는다. 곽은영의 '관목들'은 내게 그런 시집이다.

'모리스 호텔'이라는 공동체

시집은 모리스 호텔의 위치를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바람이 많이 불며 여름에 선선하고 겨울이 추운 석회암 지대, 오래된 채석장과 계곡이 있는 평범한 시골 마을. 몇 줄 읽었을 뿐인데 나는 이미 그곳에 도착해 있다. 영국의 작은 마을 같기도 하고, 강원도의 산골 같기도 한 풍경. 나는 그 안에서 모리스 호텔의 문을 두드린다. 이상하게도 한 번쯤 가본 듯한 곳이다.

모리스 호텔에는 특별한 사건이 없다. 식물도감을 읽는 호스트, 쿠키를 구워오는 쌍둥이 할머니, 자동차를 고치는 정비공, 우체부, 그리고 이름 없는 여행자들이 각자의 하루를 살아간다. 서로의 삶을 뒤흔들 만큼 가까워지지도 않고, 그렇다고 무심히 스쳐 지나가지도 않는다. 누군가 아프면 곁을 지키고, 누군가 떠나면 조용히 배웅한다. 곽은영의 시는 감정을 앞세우지 않는다. 다만 풍경을 따라가다 보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드러난다.

그래서 시집의 제목은 '관목들'이다. 큰 나무는 홀로 우뚝 서지만, 관목은 서로의 가지를 포개며 숲을 이룬다. 시인이 굳이 '관목들'이라는 복수형을 택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 시집은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서로 기대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서사를 거의 만들지 않는데도 풍경만으로 공동체를 완성한다.

지도에는 없는 다정한 세계

시집에서 가장 인상적인 시는 '진혼-모리스 호텔 25'이다. 언니는 세상을 떠나는 동생에게 말한다. "마지막 숨을 내쉬면 생이 완성될 거야." 죽음을 끝이 아니라 완성이라고 부르는 이 문장은 오래 마음을 붙든다. 모리스 호텔은 살아 있는 사람만 머무는 곳이 아니라, 떠나는 사람까지 다정하게 배웅하는 곳이다. 슬픔을 혼자 감당하지 않아도 되는 세계다.

그런 세계는 거창한 희생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시집에는 비워지지 않는 고양이의 밥그릇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고통을 느끼는 호스트와 '우체부를 위한 오후의 뒤뜰 바비큐 잔치'가 열리면 모두가 손을 보태는 이웃들이 있다. 서로의 하루를 조금씩 지탱하며 살아간다. 시인은 이 평범한 풍경을 오래 바라본다. 누구도 이야기의 중심은 아니지만 서로의 일상을 받쳐 주는 모두가 서로의 주인공이다.

혼자 사는 일이 특별하지 않은 시대다. 누군가의 이름을 기억하는 일보다 비밀번호를 기억하는 일이 더 익숙해졌고, 안부를 묻기보다 배송 조회를 먼저 한다. 우리는 외로움을 견디면서도 관계를 두려워한다. 우리는 언제부터 모리스 호텔을 잃어버렸을까.

어떤 여행은 낯선 풍경을 만나기 위해 떠난다. 그러나 '관목들'이 데려간 곳은 장소가 아니라 살아가는 방식이다. 시집은 끝났지만 모리스 호텔은 끝내 지도에서 찾지 못했다. 어쩌면 그곳은 처음부터 존재하는 장소가 아니라, 서로의 삶에 조금씩 시간을 내어줄 때마다 생겨나는 공간인지도 모른다. 모리스 호텔은 찾는 장소가 아니라 살아내야 하는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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