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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호순

시인·배바우도서관장

여름이 오면 마음 한쪽이 먼저 버스 터미널로 걸어 나가 차표를 끊는다. 어릴 적 휴가란 거창한 가방을 꾸리는 일이 아니었다. 그저 고향이라는 오래된 서랍을 열어보는 길이었을 뿐. 그 길목에서 매미는 한낮의 소리 보따리를 풀었다 쌌다 하며 풀죽은 공기를 깨웠고, 능소화는 해사한 웃음을 머금은 채 낮은 담벼락을 서성이었다. 그 풍경만으로도 고향의 마당은 이미 고추며 옥수수, 고야와 복숭아가 저마다의 빛깔로 여름을 꾹꾹 눌러 담고 있는 셈이었다.

고향의 품에 안기면 가장 먼저 마중 나오는 것은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맑은 바람과 초록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눈부신 녹음이었다. 그 싱그러운 배경 위로 부모님이, 친가의 어른들이, 동네 선후배들이 기억의 책장 속에서 걸어 나오듯 줄줄이 다정한 얼굴을 내밀었다. 냇가에서 그물을 던질 때마다 달빛이 물비늘이 되어 손등 위로 부서지던 여름밤, 모깃불이 피워 올리는 매캐한 연기 속에서 나눠 먹던 옥수수의 단맛 평상에 누우면 이마 위로 쏟아질 듯 일렁이던 별들의 바다. 손바닥만 한 마루에 둘러앉아 매운탕을 나누던 자리는 늘 비좁았지만 비좁은 만큼 서로의 체온이 먼저 닿아 어깨가 따뜻했다.

그렇게 영원히 흐르지 않을 것 같던 눈부신 여름이었건만 이제 그 모든 풍경은 손대면 바스러질 것 같은 아스라한 관념이 되어버렸다. 고향이라는 단어는 여전히 입술 끝에 맴도는데 막상 당도한 곳엔 나를 마중 나올 발소리가 없다. 집은 헐려 흔적도 없고 밭은 타인의 손에 넘어가 버렸으며 친가의 어른들은 저녁노을이 산마루를 넘어가듯 한 분 한 분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가 사라지셨다. 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이라는 실은 이토록 서둘러 풀려버리는 것일까. 매일 서로의 눈빛을 담던 사이도 뜨거운 밥 한 그릇의 온기를 나누던 사이도 만남의 발길이 끊기고 나면 결국 서로의 계절조차 묻지 않는 서늘한 타인이 된다. 인연이란 어쩌면 마주 잡은 손의 온도와 같아서 손을 놓는 그 서글픈 고요의 순간부터 소리 없이 식어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가슴 속 향수는 지워지지 않는 얼룩처럼 번져온다. 여름의 길목에 서면 어김없이 그 시절의 냄새와 소리가 가슴 한구석에서 물무늬를 그리며 피어오른다. 그러나 나의 발길은 늘 타향의 차가운 보도블록 위를 맴돌 뿐이다. 그립다 외친들 서글픈 메아리 외에 무엇이 돌아올 것이며 보고프다 한들 떠나간 이가 시간을 거슬러 걸어오겠는가. 돌이켜보면 나 역시 누군가에게는 먼저 손을 스르륵 놓아버린 무정한 사람이었으리라. 바쁘다는 핑계로 멀다는 핑계로 서랍 깊숙이 밀어두었던 안부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인연의 끈을 단단히 묶는 일에는 그리도 게을렀으면서, 끈이 다 풀어져 길을 잃은 뒤에야 그리움이라는 부질없는 독백을 읊조리는 내 모습이 못내 부끄러워지는 밤이다.

물길만이 홀로 흘러 과거의 기억을 실어 나르는 냇가 맑은 물줄기를 들여다본들 이제 누구 하나 물속에서 손을 흔들어줄 리 없다. 사람이 사라진 자리에 풍경만 덩그러니 남으면 풍경은 더 이상 마음이 쉴 고향이 아니라 고향이 남긴 쓸쓸한 그림자일 뿐이다. 이제 매미는 주인 없는 숲에서 홀로 소리 보따리를 풀었다 쌌다 할 것이고 능소화는 누구에게 보여줄지 모를 애달픈 웃음을 머금은 채 담벼락을 능구렁이처럼 넘고 있을 것이다.

그래도 자꾸만 기억의 실타래를 풀어 가고 싶은 것은 내 어머니가 살을 깎아 나를 낳고 기른 눈물겨운 대지이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지문이 묻어 있는 마당, 가마솥 가득 더운 김을 피워 올리던 어머니의 부엌 나를 업고 서성거리던 그늘진 골목길. 사람도 집도 밭도 시간의 뒤안길로 사라졌을지언정 그 대지 아래 켜켜이 쌓인 시간의 나이테만큼은 누구도 거두어가지 못한다. 사라진 것들의 긴 목록을 소리 내어 헤아리다 보면 결국 마지막까지 남는 것은 지워지지 않는 기억을 문신처럼 새기고 있는 '나'라는 서글픈 증거뿐이다. 그리하여 여름이 오면 갈 수 없는 먼 시간의 영토를 향해 마음이 먼저 맨발로 길을 떠난다. 육신은 타향의 단단한 사슬에 묶여 있어도 영혼은 해마다 푸르렀던 소년의 여름 속으로 쉼 없이 걸어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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