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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26.07.19 14:40:18
  • 최종수정2026.07.19 14:40:18

한기연

음성문인협회장

작은방 한구석에 놓인 오래된 목재 서랍장은 내 방에서 가장 조용하면서도 가장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가구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모서리는 둥글게 닳아 있고, 나뭇결 사이사이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작은 스크래치들이 훈장처럼 새겨져 있다. 함께 한 삶의 파편이 쌓이면서 단순히 물건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주말 오후, 필요 없는 물건을 정리하며 오래된 서랍을 열었다. 서랍을 당길 때마다 '삐걱'하는 특유의 마찰음은 마치 과거의 문을 여는 신호음처럼 들린다. 가장 아래 칸 서랍을 열자, 해묵은 종이 냄새와 함께 아련한 향수가 방 안 가득 퍼져 나갔다. 당시에는 인생 최대의 위기였던 고민이 지금 돌이켜보면 성장통에 불과했다는 사실에 미소가 지어졌다. 시간이 흐르면서 날카로웠던 감정의 모서리는 조금씩 둥글게 닳아졌다.

편지 한 장을 채우기 위해 무슨 말을 쓸지 고민하며, 정성스레 보낸 친구의 마음이 수십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나에게 다가왔다. 스마트폰 메신저로 몇 초 만에 단어를 전송하는 요즘 시대에는 잊고 지냈던 묵직한 울림이다. 물질은 낡아가지만, 그 안에 담긴 진심은 결코 바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렌즈를 통해 바라봤던 세상의 풍경들, 함께 웃고 울었던 사람들의 얼굴이 필름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마냥 영원할 것 같았던 순간들이 지금은 한 장의 사진과 기억으로만 남아 존재한다는 사실이 조금은 쓸쓸하다. 하지만 그 기억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존재할 수 있음을 알기에 감사하다.

우리는 매일 앞으로 나아가기 바쁜 삶을 살아간다. 새로운 정보를 습득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며, 끊임없이 변하는 세상의 속도에 발을 맞추려 애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너무나 쉽게 소중한 과거의 기억들을 잃어버리거나 잊고 살아간다. 등 뒤를 돌아볼 여유조차 없이 앞만 보고 달리다 보면, 문득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바쁜 세상이 주는 속도감에 지칠 때면 감정에 날이 선다. 그럴 때 가끔 낡은 서랍에 있는 물건들이 숨 고르는 시간을 준다. 서랍 속 물건을 하나씩 만져보고 정리하는 과정은, 단순히 과거를 추억하는 행위를 넘어 흩어져 있던 나의 내면을 들여다본다. 내가 어떤 것을 좋아했는지, 어떤 꿈을 꾸었는지, 그리고 어떤 아픔을 견디며 성장해 왔는지를 서랍은 묵묵히 증명해 준다.

과거의 나를 마주하는 것은 현재의 나를 위로하고, 나아가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는 과정이기도 하다. 내가 걸어온 모든 시간이 저 서랍 속에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다는 안도감 덕분일 것이다. 앞으로 또 치열한 일상을 살아가다 마음이 지치고 방향을 잃을 때, 나는 언제든 이 시간의 결을 매만지는 서랍을 다시 찾을 것이다. 그곳에는 언제나 변함없이 나를 기다려주는 '가장 나다운 나'의 모습이 있을 테니까.

서랍 속 쌓인 먼지를 닦아내고 문을 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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