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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26.07.12 15:51:18
  • 최종수정2026.07.12 15:51:18

박명애

수필가

지름길인 큰길을 놔두고 부러 돌아가는 길이 있다. 오래된 주택들 사이로 난 골목인데 철망으로 이루어진 낮은 울타리에는 계절 따라 덩굴이 감고 오르며 피고 지는 꽃들이 곱다. 흰색과 분홍, 짙은 보라색 으아리가 꽃등처럼 켜질 때도 있고 탐스러운 수국이 철망 밖으로 탐스런 꽃봉오리를 내밀기도 한다. 요즘엔 유월부터 피기 시작한 덩굴장미가 흐드러져 시선을 끌었다.

엊그제는 밤새 천둥번개가 치고 폭우도 쏟아져 걱정이 많았다. 한바탕 큰 비가 내리고 나면 사람과 더불어 주변 환경들도 영향을 받는다. 시장 가는 길에 지나는 그 골목 풍경도 다를 바가 없었다. 붉게 피던 베고니아도 바람에 살랑거리던 풍접초도 바닥에 넘어져 있고 담장 아래는 장미꽃잎들이 쏟아져 붉은 꽃길이 되었다. 찢긴 꽃잎들을 위로하듯 잔가지 사이로 한줄기 햇빛이 비쳤다. 만개했던 꽃들은 부서졌지만 낮은 철책을 따라 뻗어가는 덩굴 속엔 붉은 봉오리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그 봉오리들이 희망처럼 느껴졌다. 오래 이 길을 걸어온 나는 안다. 시간이 지나면 다시 화초들은 곧추서고 장미들이 소담하게 필 것임을. 장미 덩굴 따라 이어지는 그 길은 꽃지면 지는 대로 피면 피는 대로 일어나는 변화들이 시간을 일깨우고 하루를 추스르게 한다. 장미 울타리가 골목을 이어가며 도시에 낭만을 부여하듯 이런 소소한 즐거움이 내게는 삶을 살게 하는 쉼표가 되기도 한다.

우리 집 베란다에도 장미가 핀다. 딸애가 장미차를 만들겠다며 모종을 사와 애지중지 사랑하는 중인데 이름도 생경한 '프레지던트 생골'이다. 흑장미 품종 중 하나로 꽃잎이 벨벳처럼 도톰하고 부드러워 벨벳 장미라고도 하는데 우아하고 기품이 있다. 빛이 들어오는 방향과 기울기에 따라 짙은 붉은색에 검은색이 신비롭게 조합된 꽃잎은 오묘하게 변화한다. 잎이 나고 몽우리가 맺히고 꽃이 피는 시간을 함께 하며 살아낸다는 사실에 숭고함을 느끼곤 한다. 때로는 인간의 욕망에 의해 개발된 품종으로 태어나 베란다라는 척박한 환경에 놓인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저항이 가시를 품은 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다보면 조지 오웰이 떠오르기도 한다..

소설 <동물농장>과 <1984>로 잘 알려진 조지오웰도 스페인 내전 이후 고립된 작은 마을에 정착해 장미와 수목들을 심고 가꾸었다. 레베카 솔닛은 투쟁의 표상이었던 오웰이 실용적인 산물을 내는 나무가 아닌 아름다움의 상징인 장미를 정원에 심었다는 사실에 깊은 의미를 부여한다. 엄혹한 시대를 살아온 그에게 장미를 심는 일이 무용해 보이지만 장미와 심는다는 행위에는 메타포가 숨어있다고 한다. 장미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해 놓칠 수 없는 모든 것이며, 심는다는 행위는 그에게 '가장 적은 비용으로 미래의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가장 멋진 일'로 오웰이 견지해 온 저항이었다고.

좋은 날 아름다운 날 가장 많이 선물하는 장미. 그 이면에 숨겨진 의미를 생각한다. 그저 아름다움에 취하는 미미함도 내겐 놓칠 수 없는 것이라 소심하게 변명하며, 골목길 장미 주인을 생각하고, 미래를 위해 무언가를 심는 일이 내게는 무엇이었을까 돌아본다. 프레지던트 생골은 비도 안 맞았는데 벌써 지려나보다. 꽃잎이 두어 장 살포시 내려앉는다. 짧게 머물다 가는 향기가 오늘따라 매혹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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