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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호순

시인·배바우도서관장

오뉴월의 하늘은 변덕스러운 아이의 마음을 닮았다. 본격적인 장마철이 시작되려면 멀었는데도 간밤에는 제법 굵은 소낙비가 지붕을 요란하게 때렸다. 투두둑, 투둑 양철 지붕을 치고 나가는 빗소리에 잠을 설치며, 나는 이제 막 초록의 완연함을 입어가던 뒷마당의 우거진 나뭇잎들을 걱정했다. 세찬 비바람에 여린 잎사귀들이 상하지는 않을까, 이제 겨우 제구실을 하기 시작한 초록이 꺾이지는 않을까 하는 조바심이 밤새 마음 한구석을 흔들었다.

아침이 찾아오고 비가 걷힌 마당으로 나섰을 때, 나는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그만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오뉴월에는 여인의 한이 없어도 서리가 내리지 않아도 땅 위를 가득 채우는 신비로운 나무가 있었다. 집 뒷마당 양쪽에 든든하게 버티고 선 두 그루의 감나무 밑 그곳에는 옅은 노랑과 그보다 더 옅은 초록빛의 알맹이들이 마치 하늘에서 쏟아진 보석처럼 흩뿌려져 있었다. 어젯밤 거센 빗줄기가 떨어뜨리고 간 흔적 고향에서 '감똑'이라 부르던 여린 감꽃들이었다.

이 꽃은 아주 작은 아기 감을 품고 있는 지상 최고의 미완성작이다. 사람들은 흔히 화려한 장미나 향이 짙은 아카시아를 예찬하지만 내게는 이 작고 연한 빛깔이야말로 유년의 기억을 관통하는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다. 사실 꽃이라지만 그리 향기롭지는 않다. 코를 가까이 대어야 겨우 맡아질 듯한 풋내가 전부다. 씹어보아도 가을날의 열매처럼 달거나 떫지도 않다. 그저 제 몸이 지닌 빛깔만큼, 딱 그만큼의 연한 향과 맛을 품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결코 무색무취가 아니다. 아주 짙지 않아서, 그렇게 은은하고 연해서 오히려 사뭇 다정하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저마다 더 붉고 향기롭다며 주위의 시선을 탐닉할 때, 이 연노랑의 조각들은 땅 위에 조용히 내려앉아 자신만의 수수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화려함으로 사람을 매료시키지 않기에 오히려 질리지 않는 편안함으로 마음에 스며드는 것이다.

이 작은 알맹이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시간은 겹겹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고향 집의 뒷마당으로 나를 데려다 놓는다. 그 시절의 우리는 나무 아래에 이 서정적인 보석들이 떨어지는 이맘때를 손꼽아 기다리곤 했다. 이른 아침 이슬이 채 마르기도 전에 마당으로 뛰어나가 상태가 온전하고 제법 굵은 것들을 보물찾기하듯 주워 모았다. 짓눌리지 않게 조심스레 치맛자락이나 작은 바구니에 담아온 알맹이들은 훌륭한 장난감이 되어주었다.

길가에 자란 부드러운 풀줄기를 하나 뜯어 서툰 손길로 그 중심을 콕콕 찔러 꿴다. 옅은 노란빛과 초록빛이 번갈아 가며 실에 꿰어질 때마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영롱한 목걸이가 완성되었다. 그중에서도 유독 알이 크고 빛깔이 고운 녀석은 따로 골라 제법 그럴싸한 반지를 만들기도 했다. 손가락에 푸르스름한 반지를 끼고 목에는 연노랑 목걸이를 걸치면, 마치 온 세상의 봄과 여름을 다 가진 부자가 된 듯했다. 풀 향기와 풋풋한 내음이 손끝에 번지던 그 시절 우리는 자연이 거저 준 보석을 몸에 두르고 온 마당을 누볐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은 더 이상 그때 그 시절의 옛 고향 집은 아니다. 세월은 흘렀고 풍경은 바뀌었으며 내 손은 어느덧 주름진 어른의 손이 되었다. 하지만 계절의 시계는 어김없이 돌고 돌아 올해도 내게 이 작은 선물을 보내주었다. 비바람에 떨어져 땅을 적시고 있는 이 연약한 열매들을 바라보며, 나는 변하지 않는 자연의 신비와 마주한다. 비록 나무에 끝까지 매달려 탐스러운 주홍빛 감으로 익어가지 못하고 중도에 떨어져 버린 삶이지만, 이것은 결코 실패한 낙과가 아니다. 자신의 계절에 피어나 아이들의 장난감이 되어주고, 어른이 된 누군가에게는 따스한 추억의 마중물이 되어주니 이 또한 얼마나 충만한 삶인가.

올해도 꽃과 함께 떨어진 작은 아기 열매를 다시 볼 수 있어서 참 다행이고 좋았다. 유년의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발밑에서 빛나는 연노랑의 알맹이들을 보며, 나는 나지막이 미소를 지어 보인다. 짙지 않아서 서글프지 않고, 연해서 오히려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 그 여린 향기가 오뉴월의 맑게 갠 하늘 아래로 잔잔하게 퍼져 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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