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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애

수필가

새벽이나 밤이 오기 전 어스름한 푸른 시간을 좋아한다. 빛이 닿으며 사물이 존재를 드러내는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노라면 마음이 맑아진다. 또 다채로운 풍경에 노을의 붉은 빛이 잠시 머물다 어둠이 내리며 모든 것들이 무채색으로 돌아가는 시간은 절로 명상과 기도를 하게 만든다. 그런데 요즘은 평단지기(平旦之氣)도 사마타 (Samatha)도 낯선 단어처럼 멀어져 버렸다. 세상이 스피커를 설치한 듯 시국에 대한 발언들로 고요한 곳 없으니 내 마음도 뒤숭숭하다. 선관위의 무능에서 비롯된 파장이 커지며 이를 기회 삼으려는 정치 세력들이 우후죽순 일어나 국민의 눈을 흐리게 하고 있다. 누가 바둑알을 움직이는지, 누가 바둑알인지. 조사를 통해 밝혀지리라 믿는다. 무엇이 어둠이고 무엇이 빛인가.

영화 <삼국-무영자>는 장예모 감독 작품으로 권력을 향한 욕망과 음모들이 만들어내는 서사가 바둑 대국처럼 펼쳐진다. 삼국시대가 배경이지만 작금의 현실 정치와 하나도 다름이 없다. 패국의 왕과 도독 쯔위, 쯔위의 아내, 그리고 쯔위의 그림자 징저우의 욕망과 배신, 음모와 위선들이 추악하게 얽혀들며 누가 미끼인지,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알 수 없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음모들이 중첩되면서 복잡한 인간의 내면과 숨겨진 욕망의 그늘이 드러나는데 처참하고 슬픈 이야기를 화면은 담담하게 보여준다.

패국의 도독 쯔위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암살당한다. 숙부는 가난한 집에서 쯔위와 외모가 흡사한 아이를 데려와 은밀하게 대역으로 양육한다. 패나라의 도독이 된 쯔위는 전투에서 심한 부상을 입고 조정에 나갈 수 없게 되자 대역인 징저우를 내보내고 완벽하게 속이기 위해 아내와도 부부인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러면서도 아내와 징저우의 사이를 의심하고 겉으로는 나라에 충성을 강조하며 징저우와 부하 장수들을 선동하지만 속으로는 왕위를 노린다. 패왕 역시 쯔위가 대역을 내세우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대역인 징저우를 이용, 약점을 건드려 정치적 우환을 제거하려 한다. 왕은 궁중에서 술과 여색을 즐기고, 거문고나 연주하며 예술에 탐닉한 채 무능하고 힘없는 척하지만, 뒤에서는 정치적으로 반목하는 무리들을 이용에 이익을 챙기고 자신의 권좌를 지키기 위해 여동생과 신하를 희생시키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 비열한 존재다. 영화 원제가 <影 >으로 그림자를 뜻하듯 그림자로 살아가는 징저우는 연기지만 고관대작으로 사는 현실과 눈이 멀었어도 아들의 발자국 소리를 기억하는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천민 출신 실체인 나 사이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그들이 서로를 속이고 칼을 겨누는 장면들이 긴박하게 이어지는 장면을 흑백으로 처리하여 욕망을 절제하지 못한 대가로 흘리는 피는 검은색으로 묘사된다. 참과 거짓, 선과 악, 주역의 음과 양으로 선명하게 대립하던 흑백의 대조는 차츰 그마저도 구분할 수 없는 회색으로 변해간다. 잔인한 현실과 달리 가늘게 혹은 세차게 비가 내리며 그려내는 풍경은 우수를 느끼게 하고 수묵화처럼 담백하다. 태극 위에서 펼쳐지는 무술 격투신은 동과 정이 어우러지며 아름답다 못해 우아하다. 권좌를 다투던 도독 쯔위와 패왕이 사라진 자리에서 그림자로 살던 징저우는 어떤 선택을 할까. 그에 의해 다른 어둠의 세계가 시작될지 홀로 빛의 세계로 들어갈지.

온갖 욕망을 제어하지 못한 채 그림자 뒤에 숨어, 빛인 척 우아하고 화려한 언변과 연기로 우리들을 자극하는 현대사회에서 누군가에게 움직여지는 바둑돌이 되지 않으려면, 자신을 잃고 그림자로 살아가지 않으려면 우리는 기다리며 깊이 들여다보는 연습을 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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