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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우의 그림 이야기 - 산과 물에 미친 산수화가 운산 조평휘

  • 웹출고시간2026.06.11 14:33:28
  • 최종수정2026.06.11 14:33:28
5월 어느 날, 대전사는 화우 L에게서 전화가 왔다. 대학 시절 은사님인 조평휘 교수님이 별세하셔 서울 장례식장에 조문하러 가는 길이라는 소식이었다. 조평휘 교수님은 직접 뵌 적은 없지만 대전 화단의 큰 어른임을 익히 알고 있었다.

만 9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운산 조평휘(1932~2026)는 전통 수묵산수화의 맥을 잇는 동시에 현대적인 조형 감각을 결합해 자신만의 화풍인 '운산산수'를 구축한 한국화 대가다.

황해도에서 태어난 그는 어렸을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인천으로 피난 와 공고를 졸업했지만, 미술에 대한 열정을 잠재우기 어려웠다. 교원양성소를 수료한 뒤 초등학교 교사를 약 1년간 하다가 미술을 정식으로 공부하고자 홍익대학교 동양화과에 문을 두드린다. 당시 여러 가지 이유로 자퇴하는 이들이 많아 동양화과 학생은 운산이 유일했다고 한다. 이런 상황 덕분에 그는 한국화 대가 김기창(1913~2001), 천경자(1924~2015), 이상범(1897~1972) 교수에게 1대1로 그림을 배우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대학 졸업 후 교사로 재직하던 중 운보 김기창 선생으로부터 "화가가 되려면 서울에 남고, 교육자가 되려면 지방으로 내려가라"는 제안을 받았다. 이에 운산은 1976년 목원대학교 미술과 한국화 담당 교수의 길을 택해 대전에 자리를 잡았다. 대전에 내려온 뒤 후진 양성에 힘쓰면서 대둔산과 계룡산 등 충청권의 자연을 주요 소재로 한 실경을 기반으로 현대 산수화를 탐구하며 지역 화단의 중추적 역할을 수행했다.

이처럼 조평휘는 대전 미술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한때 대전 미술계에서는 그의 영향을 받은 작품과 받지 않은 작품으로 나눌 정도로 운산이 끼친 영향은 지대했다. 필자는 '한국화동질성전'을 통해 20년 전부터 대전 지역 작가들과 전시회를 열고 있는데 목원대학교 출신 작가들은 산수화 작품을 많이 그리는 것을 봐왔다. 이는 대학 시절 조평휘 교수의 영향을 받은 결과라 생각된다.
클릭하면 확대이미지를 볼 수 있습니다.

조평휘 '대둔산'(160×455㎝, 한지에 수묵채색, 2007)

ⓒ 뉴시스
운산은 대학 졸업 후 당시 미술계에서 유행하던 형태를 부정하며 미술가의 즉흥성과 격정적 표현을 중시한 엥포르멜 운동의 영향을 받아 추상화도 그렸다. 그러다 산수화를 다시 시작하면서 자연 그대로를 묘사하는 실경산수화보다는 자연의 모습을 추상적으로 머릿속에서 재구성해 그렸다. 엥포르멜처럼 이성의 틈을 허락하지 않고 순간의 감정을 절실히 담아 표현한 것이다. 그는 "산수화는 그대로 모방해 그리는 것이 아니라 철학을 담는 도구"라고 말했다.

조평휘의 인생관은 "인생은 자연에 맡기고 순리대로 사는 것이 제일 좋다"고 할 만큼 자연주의였다. 하지만 작품에서는 계획적이고 치밀했다. 한국화는 서양화처럼 덧칠하지 않는다. 일필(一筆)은 붓에 먹을 다시 먹이지 않고 단번에 그리는 수묵화의 핵심 붓놀림으로, 이를 익히기 위해선 오랜 훈련이 필요하다. 운산은 70년 가까이 이 길을 갈고 닦았다.

그의 아호 '운산(雲山)'은 자신이 즐겨 그린 산에서 따온 것이다. 특히 산을 정적인 풍경이 아닌 살아 움직이는 기운으로 표현했고, 구름을 통해 현실과 이상을 잇는 공간으로 확장했다. 강한 필치와 먹의 대비, 장대한 산세 표현으로 한국 수묵산수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이 양식은 높이 평가받고 있다.

평소 한국화를 전공하는 제자나 후배들에게 그는 "힘들다고 도중에 그만두면 아무 의미 없다. 시작했으면 끝까지 해야 한다. 난 산에 미치고 물에 미치고 자연에 취했다. 예술은 미쳐야 한다. 미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해낼 수 없다"라며 강한 의지를 전했다. 스스로를 게으르다고 겸손하게 말했지만 끊임없는 연구와 작업에 대한 광기 어린 열정으로 평생을 보냈다. 왜소한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고집스러운 작가 기질과 온유한 표정, 자상한 말투가 교육자적 성품과 어우러진 외유내강형 작가로 회자되고 있다.

90세가 넘어서도 작품 활동에 매진해 노익장을 과시했으며, 작품에 대한 열정만은 여전히 청춘과 같았다. 그의 작업실 한쪽 벽면에는 웅장한 산수화 작품들이 가득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생전에 어느 기자가 앞으로의 꿈과 계획을 묻자 "내 이름을 딴 웅장한 미술관을 지어 후세에 널리 알리고 싶은 마음이 없겠는가. 하지만 그런 것은 다 허울 좋은 말일 뿐, 작업에 충실해서 얻은 좋은 작품만이 작가의 생명을 연장시켜 줄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은 '이동우 미술관'을 연 필자에게 겉멋에 휘둘리지 말고 작품에 매진하라는 엄한 충고로 들려 마음이 뜨끔하다.

"팔다리가 움직이고 정신이 건강한 이상 좋은 작품을 위해 꾸준히 노력하겠다"며 작업실 한쪽에서 소박한 미소를 짓던 운산은 2026년 5월 경기도의 한 요양병원에서 이 세상 소풍을 마쳤다.

산책하다 하늘을 바라보니 흰 구름들이 파란 화선지에 그려진 한 폭의 산수화 같았다. 그 구름 산수화를 그린 이는 한 달 전 하늘나라로 떠난 운산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멍하니 오랫동안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동우

미술관장·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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