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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자

수필가

다리 수술을 받고 돌아온 집안은 낯설 만큼 고요했다. 평생을 종종걸음 치며 살림을 돌보고 가족들의 앞길을 쓸고 닦던 내 발걸음이 멈추자, 내 삶도 덩달아 서재라는 작은 방 한칸에 덜컥 갇혀버린 듯했다. 마취가 풀려간 자리에 밀려드는 육체적인 통증보다 나를 더 깊은 어둠으로 밀어 넣은 것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과 절망감이었다.

늘 가족들 앞에 서서 매서운 바람을 막아주는 단단한 울타리라고 믿었던 내가, 하루아침에 누군가의 손길 없이는 화장실조차 가기 힘든 처량한 신세가 된 것이다. 생의 가장 낮은 곳으로 툭 떨어진 것만 같던 그때, 나는 비로소 진짜 '가리개'의 얼굴을 보았다.

평생 살림이라곤 곁눈질도 하지 않던 남편이었다. 그런 남편이 방문을 열고 서툰 발걸음으로 밥상을 들고 들어왔다. 국물은 사방으로 넘쳐흐르고 반찬 그릇은 투박하게 놓였지만, 밥상머리에는 남편의 붉어진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서재 문틈 사이로 들려오는 거실의 소음들은 낯설고도 눈물겨웠다. 우당탕탕 찌개 냄비가 부딪치는 소리, 세탁기 돌리는 법을 몰라 가전제품을 붙잡고 한참을 헤매는 남편의 한숨 소리, 면역력이 약해진 내게 혹여 감기라도 찾아올까 싶어 마른걸레를 들고 집 안 구석구석을 닦아내던 거친 숨소리들.

그동안 남편이 내놓은 그 정직한 노동과 서툰 헌신은 그 어떤 기와지붕보다 아늑하고 따스한 가리개가 되어 내 시린 몸과 마음을 덮어주었다. 부엌에서 들려오는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서재 침대에 누워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

돌이켜보면 오만이었다. 남편과 자식들에게 닥칠 시련을 내가 미리 걸러내고, 내가 조금 더 고단하면 내 가족이 더 행복해질 것이라 믿으며 늘 한 발 앞장서 걸었다. 부모라는 이름으로, 아내라는 이름으로 삶의 무게를 온전히 혼자 짊어지려 했던 그 열심이 어쩌면 가족들이 내게 다가올 기회를 가로막는 벽이었을지도 모른다. 남편의 땀 젖은 등 뒤에서 깨달았다. 가리개는 한 방향으로만 세워진 차가운 벽이 아니었다. 때로는 서로의 부끄러움과 아픔을 보이지 않게 가려주고, 때로는 그 안에서 희망이 환하게 피어나도록 서로를 품어주는 눈물겨운 울타리였다.

폭풍우가 지나간 자리에 마침내 다시 해가 뜨는 것처럼, 나를 가려주던 남편의 사랑 덕분에 나는 부러진 다리에 다시 힘을 기르고 세상 밖으로 걸어 나올 희망을 품었다.

마침 오늘은 오월의 어버이날이다. 장성한 아이들이 카네이션을 들고 찾아와 내 가슴에 달아주며 활짝 웃었다. 아이들의 환한 미소 위로, 이제는 저 은하 세계에 계실 내 부모님의 아릿한 얼굴이 겹쳐온다. 그러고 보니 내 부모님 또한 매서운 진눈깨비와 비바람 속에서 우리 형제들의 어깨가 젖을세라 당신들의 온몸으로 벽이 되어주셨던 분들이었다. 턱 끝까지 숨이 차오르도록 정성껏 쌓아 올린 삶의 탑 아래에 서서, 다음 세대인 우리가 길을 잃지 않도록 기꺼이 이정표가 되어주셨던 나의 거대한 가리개.

서로가 서로의 다정한 가리개가 되어줄 때, 우리는 비로소 이 험한 세상 속에서도 온전해질 수 있는 까닭이다. 오월의 햇살이 남편과 내가 함께 서 있는 거실의 울타리 안으로 따스하게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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