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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비

시인·중앙대문예창작학과 박사

운동화 끈을 조이고 아파트를 나섰다. 주차장에서 이어지는 정문 처마를 벗어나고 나서야 추적추적 젖고 있는 세상이 시야에 들어왔다. "우산!" 이라는 단어가 입술 사이에서 터져 나왔다.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현관문을 열었다. 신발장 구석에 있던 우산을 들고 빗속으로 스몄다. 빗줄기를 막아주는 우산 덕분에 무사히 일터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이들과 정신없이 지내다 퇴근 시간을 맞았다.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말갛게 개어 있었다. 서둘러 가방을 챙겨 교문을 나와 집을 향해 걸었다. 현관문을 열고서야 "아, 우산!"이라는 말이 입안을 맴돌았다. 아침엔 그렇게 간절했던 존재를 까맣게 잊고 놓고 온 것이다. 우산은 마치 힘든 날이면 문득 문득 가슴으로 찾아오는 엄마 같다. 햇살 아래 서 있을 때는 기억에서 스르르 멀어졌다가 비가 내릴 때는 세상 그 무엇보다 간절한 존재, 내게 슈룹은 바로 '엄마'였다.

'슈룹'이라는 아름다운 순우리말을 떠올린다. 둥글게 펼쳐져 비바람을 막아주는 그 모양새만큼이나 포근한 말, 어찌 들으면 어디 먼 유럽에서 들려오는 소리처럼 이국적으로 느껴지는 발음이다. 엄마는 평생을 나의 '슈룹'이었다. 내 인생에 내리는 이슬비부터 장대비며 폭풍우까지 , 심지어 매서운 눈비가 뺨을 때릴 때도 엄마는 언제나 내 머리 위로 당신의 몸을 넓게 펼쳐주셨다. 당신의 온몸이 축축하게 젖어가는 것도 잊고, 오직 자식이 맞을 풍파를 대신 받아주던 나의 슈룹. 나는 그 그늘을 왜 당연하다고만 여겼을까.

엄마가 세상을 떠나신 지 1년이 흘렀다. 시간은 약이라는 말처럼 네 번의 계절이 흐르며 슬픔의 날 선 모서리도 조금은 무뎌졌다. 맑은 날의 퇴근길처럼, 평온한 일상에서 엄마라는 존재를 까맣게 잊고 지내기도 한다. 그러나 마음속에 궂은 비가 내리는 날이면, 여지없이 가슴 깊은 곳에서 툭 하고 터져 나온다. 이제는 부르고 싶어도 대답해 줄 이 없는 말을 소리 내어 읊조릴 때마다, 덩그러니 두고 온 우산처럼 내가 엄마를 너무 쉽게 잊고 살았던 것은 아닌지 자책감이 밀려온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음식을 만들 때는 엄마가 더 뇌속을 가득 물들인다. 엄마가 해 주시던 진달래 화전을 부치며, 쑥버무리를 하며, 부추전을 만들며 아득한 그리움의 맛을 떠올린다. 삼복더위를 잘 이기라고 해주시던 삼계탕과 가을날 솔잎 향 가득하게 빚어내던 송편. 동지면 새알심을 넣은 팥죽, 정월대보름이면 부럼과 오곡밥을 해주시던 엄마. 계절의 길목마다 자식들의 입을 채우고 삶을 지탱해 주던 엄마의 그 지극한 손맛이, 사무친다.

비록 지금은 내 머리 위를 가려줄 엄마라는 슈룹이 곁에 없지만, 엄마가 남긴 사랑의 온기는 여전히 내 삶의 걸음마다 스며있다. 앞으로도 인생의 소나기는 수없이 나를 찾아올 것이다. 그럴 때마다 비를 막으며, 나를 지켜주었던 그 커다랗고 따뜻했던 슈룹을 떠올릴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영원히 펼쳐져 나를 지켜줄 나의 슈룹, 오늘 밤은 유독 그 넉넉했던 품이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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