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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26.05.21 14:49:57
  • 최종수정2026.05.21 14:49:57

이혜연

AG아트홀 대표

나는 삼남매 중 장녀로 태어나 강인하고 희생적인 부모님의 사랑 속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의 부모님은 내게 늘 변함없는 존재였다. 언제나 강했고, 어떤 순간에도 나를 지켜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부모님도 시간의 흐름을 비껴가는 사람들처럼 느끼며 살아왔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엄마의 모습이 조금씩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무거운 짐도 번쩍 들던 엄마가 이제는 "이건 좀 무겁다" 하시며 한숨을 쉬셨고, 작은 글씨를 읽을 때면 자연스럽게 돋보기를 찾으셨다. 예전 같으면 대수롭지 않게 넘겼을 말에도 오래 마음이 머무는 듯했고, 전화를 걸면 안부보다 "오늘은 어디가 아프다"는 이야기가 먼저 시작되곤 했다. 병원에 다녀오신 이야기가 우리 대화의 절반을 차지하는 날도 많아졌다.

처음에는 그런 변화가 낯설고 불편했다. "엄마도 나이가 드시는구나"라는 이해보다 "왜 예전 같지 않을까"라는 마음이 먼저 들었던 것 같다. 늘 든든했던 존재가 약해지는 모습을 바라보는 일이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는 부모님의 희생과 사랑은 당연하게 여기면서도, 부모님 역시 늙어가는 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애써 외면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깨닫게 되었다. 엄마가 변한 것이 아니라 시간이 흐른 것이고, 그 시간의 대부분이 우리 삼남매를 위해 쓰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내가 아플 때 밤을 새워 곁을 지켜주던 시간, 원하는 것을 해주기 위해 당신의 것을 아끼며 살아온 날들, 자신은 누리지 못한 기회를 자식에게 주기 위해 묵묵히 견뎌온 세월들. 그 수많은 시간이 차곡차곡 쌓여 지금의 엄마를 만들고 있었다.

그제야 알게 되었다. 엄마가 늙어간다는 것은 단순히 나이가 드는 일이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 살아온 시간이 몸과 마음에 남는 과정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시간의 이름은 결국 사랑과 희생이라는 것도 함께 깨닫게 되었다.

이 사실을 이해하고 나서야 내 태도도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엄마의 느림을 답답해하기보다 먼저 손을 내밀게 되었고, 반복되는 이야기도 대충 흘려듣지 않고 한 번 더 귀 기울이게 되었다. 엄마를 '돌봐야 하는 사람'이 아니라 여전히 사랑받아야 할 한 사람으로 바라보게 된 것이다.

올해 어버이날에도 부모님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작은 용돈과 카네이션을 준비했다. 예전에는 그저 의례적인 행사처럼 느껴졌던 시간이 이제는 참 소중하게 다가온다. 내년에도, 그다음 해에도 이렇게 함께 웃으며 같은 시간을 보낼 수 있기를 바라게 된다. 그리고 그 평범한 하루가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엄마는 여전히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다만 이제는 사랑의 방향이 조금 달라졌을 뿐이다. 엄마가 늙어간다는 것은 분명 슬픈 일이지만, 동시에 내가 더 많이 사랑할 시간이 아직 남아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랑합니다,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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