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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숙

(전)청주시평생학습관장

시간을 헛되이 보내고 싶지 않아, 그동안 배우고 싶었던 강좌를 신청하고 첫 수업에 들어갔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어색하지 않게 눈인사를 나누며 자리에 앉는다. 늘 맨 앞자리를 좋아했지만, 이제는 뒷줄이 더 편하다.

뒤에 앉아 사람들의 모습을 관찰하고, 여유롭게 바라보는 시간이 좋아졌다. 어쩌면 그 여유는 선뜻 앞으로 나서지 못하는 마음을 숨기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지갑 속에 늘 몇 장씩 넣고 다니던 명함도 이제는 한 장뿐이다. 그것도 글씨가 보이지 않게 뒤집어 넣어 둔다.

지갑 깊은 곳에 있던 마지막 명함 한 장을 꺼내 본다. 처음 그 명함을 손에 쥐던 날의 떨림이 떠오른다. 내 이름 앞에 붙은 직위는 세상이라는 거친 바다에서 나를 지켜줄 울타리 같았다. 그 직위를 붙잡고 쉼 없이 달려왔다.

그토록 뿌듯했던 명함은 성취의 상징이자, 치열했던 시간의 결과물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명함은 지나온 시간의 기록이 되었다. 직함이 사라진 자리에는 내 이름 석 자만 남았다.

처음 만난 사람이 나를 무엇이라 불러야 할지 머뭇거리는 그 짧은 침묵 속에서, 나는 분명한 사실을 마주한다. 이제는 직위가 나를 설명해 주지 않는다. 내가 써 내려갈 문장만이 나를 설명해 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내 이름에 덧붙일 수식어가 없는 것도 아닌데, 아직은 어색하다. 눈이 녹은 자리에서 막 고개를 내민 새싹처럼. 땅속에 있을 때는 세상 밖으로 나가고 싶어 애타게 기다렸는데. 막상 밖으로 나오니 어디로 향해야 할지 알 수 없다. 햇볕을 따라 자라야 할지, 바람에 몸을 맡겨야 할지 방향을 잡지 못한 채 서성인다.

오랜 잠에서 깨어난 탓일까. 두꺼운 껍질을 벗고, 이제 내 이름에 어울리는 새로운 수식어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순간, 나를 부르는 소리에 놀라 눈을 떴다.

강의실 앞쪽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첫 수업의 자기소개 시간이었다. 사람들이 웃으며 묻는다.

"뭐 하세요·"

"집에서 쉬고 있어요." 내 입에서 나온 말이었지만, 어쩐지 낯설게 들렸다. 그 말 한마디로 나를 설명하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그 안에 접혀 있는 것 같았다. 바쁘게 살아온 시간도, 이름 앞을 채우던 직함도 어느새 멀어지고, 남은 것은 '쉬고 있다'라는 말뿐이었다.

사람들은 이제 밖으로 나와 움직이라고 말한다. 집에 머물기보다 더 역동적으로 살아보라고. 그 말에 누군가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누군가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시선을 돌렸다.

나는 새하얀 종이를 펼쳐 앞으로의 나를 적어 본다. 내 이름 앞에 붙일 단어들을 하나씩 떠올려 본다.

"뭐 하세요·"

이 질문에 어떤 답을 할 것인가.

이제는 내 삶의 방향을 스스로 정하고, 단단히 뿌리내리고 싶다. 쉽게 흔들리지 않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내 속도대로 자라나고 싶다.

나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사람.

누군가의 곁에서 조용히 힘이 되어주는 사람.

그 한 줄이 언젠가 내 이름 앞에 붙기를 바라며, 그렇게 살아가기로 마음먹은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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