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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호순

시인·배바우도서관장

사람들의 시선은 높은 곳, 화려하게 초록을 터뜨리는 나뭇가지 끝에 머문다. 바람을 먼저 맞고 햇살을 온전히 독점하는 것들만이 봄의 주인공 대접을 받는다. 엄동설한의 동토를 견디며 뿌리에 저장해 둔 영양분을 한 방울도 남김없이 밀어 올리는 인고의 드라마는 확실히 높은 곳의 새순들에게 더 잘 어울리는 화려한 수식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매년 봄이 오면 나무 위가 아니라 발밑의 흙을 본다. 대지를 헤집고 올라오는 굵직한 줄기들을 만나기 위해서다. 땅 두릅이다.

이것들은 태생부터 다르다. 든든한 나무의 품이 아니라 독활(獨活)이라는 여러해살이 풀에서 홀로 돋아나는 새순이다. 세상이 상식이라 부르는 유려한 봄나물들과는 색과 모양부터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높은 곳의 연한 초록이 순수를 자랑한다면 땅두릅은 흙빛을 닮은 거칠고 붉은 기운을 온몸에 두르고 있다. 줄기는 유난히 굵고 억세며 겉면에 돋아난 잔털들은 시장 바닥에서 거친 세월을 버텨낸 장사꾼의 턱수염처럼 투박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를 대수롭지 않게 지나치거나, 그저 화려한 참두릅의 아류쯤으로 여기고 만다.

하지만 나는 그 붉고 투박한 줄기를 볼 때마다 누군가의 얼굴들이 겹쳐 보인다. 겉으로는 가시가 돋친 듯 서툴고 무뚝뚝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도무지 마르지 않는 끈끈한 온정을 품고 살았던 내 주변의 사람들이다. 그들은 인생의 봄날에도 높은 가지 끝으로 올라가 화려하게 자신을 뽐낼 줄 몰랐다. 그저 묵묵하게 땅을 딛고 서서 제 몸을 굵게 키워 주변을 지탱하는 것이 삶의 전부인 줄 알았던 이들이다. 세련된 말솜씨나 화려한 명함은 없어도 슬그머니 다가와 묵직한 위로를 건네던 그 투박한 어깨들이 이 거친 줄기 속에 고스란히 박혀 있다.

이 붉은 줄기의 진짜 매력은 그것을 꺾어 속을 들여다볼 때 비로소 드러난다. 칼끝을 대어 그 굵은 대를 툭 잘라내면 나무 위에서 자란 것들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미끈하고 끈적한 진액이 울컥 흘러나온다. 겉은 그토록 단단하고 거칠어 보였는데 그 속살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여리고 축축하다. 그 미끈한 점액질 때문에 씹을 때의 식감도 완전히 다르다. 아삭하고 쌉싸름하게 순식간에 끝나버리는 봄의 맛이 아니다. 끈적한 진액 때문에 입안에 오래도록 머물며 특유의 깊고 알싸한 향을 남긴다.

사람도 그렇다. 어떤 이들은 겉보기에 유난히 붉고 모가 나 있다. 말씨는 거칠고 행동은 투박해서 선뜻 곁을 내주기가 망설여진다. 하지만 그런 사람일수록 그 거친 껍질을 한 꺼풀 벗겨내고 나면 그 안에는 남모르게 품어온 끈끈한 다정함과 눈물이 가득 차 있곤 한다. 험한 세상을 살아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겉을 단단하게 무장했을 뿐 내면에는 맹목적일 정도로 깊은 사랑이 점액처럼 고여 있는 것이다.

모양이 살짝 비슷하다고 해서 다 같은 존재가 아니듯 사람 역시 겉모습만 보고 그 속의 깊은 식감까지 다 안다고 자만해서는 안 된다. 이 봄의 산야를 채우는 수많은 새순들이 저마다 다른 높이에서 저마다 다른 색과 성질을 품고 자라난다. 다양함 속에서 우리는 유독 눈에 띄고 화려한 것만을 인생의 정답이라 믿으며 살아온 것은 아닐까.

오늘 시장 모퉁이에서 검은 비닐봉지에 담긴 붉은 줄기 한 무더기를 샀다. 집에 돌아와 싱크대 수돗물에 붉은 흙을 씻어내는데 줄기 사이로 배어 나온 점액이 내 손가락 끝에 진득하게 들러붙는다. 쉽게 떨어지지 않는 미끈한 감촉이 마치 끊어내려 해도 지독하게 얽혀 있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고 씻어내려 해도 손끝에 남아 맴도는 지독한 정(情) 말이다.

이 봄이 다 가기 전에 이 투박한 땅 두릅을 살짝 데쳐 식탁에 올리려 한다. 초고추장에 찍어 입안에 넣으면 겉은 거칠었으나 속은 한없이 깊고 여렸던 그 향이 온몸으로 퍼져나갈 것이다. 세상의 모든 화려한 것들이 가지 끝에서 흔들릴 때,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키며 속으로 진액을 채워온 붉은 줄기들을 위해 오늘은 나도 낮고 겸손한 자세로 조용히 젓가락을 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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