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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26.05.12 13:58:51
  • 최종수정2026.05.12 13:58:50

박명애

수필가

오래 망설이다 가위를 꺼내 든다. 날을 소독하고 호접란을 책상 위에 올려놓는다. 꽃은 지고 꽃대만 남았는데 마른 꽃 하나가 피었던 그 자리에 붙어 있다. 수분이 마르며 꽃잎이 오므라들긴 했지만 모양은 흐트러지지 않은 채 단정하게 매달려 있다. 마른 꽃을 따서 책갈피에 넣어두고는 단단하고 굵은 꽃대를 한마디 남겨 두고 잘라냈다. 왠지 아쉽고 서운하다.

집에는 호접란 두 종류가 있는데 딸애 전시 때 들어온 선물로 흰 꽃이 피는 '화이트민트'와 보랏빛 감도는 푸른 꽃이 피는 '블루 사파이어'다. 옛 중국에서 나비와 비슷하다 하여 '胡蝶蘭'이라 불렀다는데, '화이트 민트 호접란'은 세련미가 있으며 여성적인 고귀함과 우아함을 상징한다. 부드럽게 휜 꽃대에 눈같이 하얀 순백의 꽃이 차례로 피는 모습은 보기만 해도 눈이 맑아진다. '블루 사파이어 호접란'은 '화이트 민트'와는 또 다른 매력을 지녔다. 타이완에서 개발된 품종이라고 하는데 원래는 '쯔치앙 사파이어'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쯔치앙(自强)'은 스스로 강하게 한다는 뜻이고 사파이어는 푸른 빛을 띠는 보석이다(국립생태원). 작고 푸른 빛 감도는 꽃이 앙증맞게 줄지어 피는데 아름답고 신비롭다.

어느 날인가, 블루 사파이어 꽃이 진 뒤 꽃대 두 개를 잘라내고 아직 한 송이가 남아있는 꽃대만 남겨 두었다. 마지막 꽃이 지더니 꽃대 끄트머리부터 마르기에 나중에 정리해야지 하고는 잊고 있었다. 그런데 중간쯤 말라가던 꽃대에서 새 꽃대가 옆으로 구부러져 수줍게 나오더니 꽃봉오리가 하나둘 맺히기 시작했다.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날마다 눈맞춤 하며 어찌나 희락 하였는지. 그러다 문득 다른 꽃대도 그대로 두었다면 2차로 새 꽃이 피었을 텐데...꽃대 세 개에 어우러져 피었을 꽃을 상상하니 새 꽃에 대한 반가움보다 속상함이 컸다. 그래서 조금 더 오래 피던 '화이트 민트'는 꽃대를 자르지 않기로 했다. 2차로 피는 꽃을 보려는 욕심에서다. 하지만 오래 지나도록 새 꽃은 나올 기미도 없고 빈 꽃대만 시들지도 않고 당당하게 서 있었다. 찾아보니 모두 꽃이 피는 것도 아니고, 2차 꽃을 보는 것도 좋지만 첫 꽃 진뒤 잘라줘야 모체가 튼튼하게 성장하여 다음 해에 더 아름다운 꽃을 볼 수 있다고 하였다. 홀린듯 눈이 멀어 꽃도 잊고 내년의 즐거움도 놓칠뻔하다니...

욕심을 덜어내듯 남은 꽃대를 싹둑 잘라내고 밖을 보니 창창한 하늘빛이 곱다. 눈이 시리도록 깊고 푸른 하늘 속으로 가지를 뻗은 나무들도 하늘 물을 머금어 초록초록하다. 보드라운 이파리들이 햇살에 반짝반짝 빛난다. 나무를 흔들던 바람들이 몰려가며 숲을 가로지른다. 숲은 한바탕 술렁대며 깊은 속살을 드러냈다 감추고 빛은 강렬하게 튀어 오른다. 바람보다 빠르게 흘러가는 게 삶이려니, 가끔 철없는 욕심으로 흔들리는 것도 살아있음의 증거 아니겠는가. 깊은 그늘 같은 속을 들키고는 생명들의 열기로 가득한 오월에 슬그머니 숨어 가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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