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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식

수필가

둘째 딸이 드디어 첫 손녀를 출산했다. 태중에 10개월을 지내다가 세상 빛을 본 손녀를 볼 때마다 그야말로 눈에 넣어도 안 아플만큼 사랑스럽다.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는 손녀를 보며 한편으론 은연중 걱정이 엄습해왔다. '저 어린 것이 자라서 이 세상을 헤쳐 나가려면 얼마나 어려움이 많을까· '라는 생각 때문이다. 이 나이 이르도록 살아보니 세상살이가 마음처럼 녹록치 않아서이다.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것은 타인의 무례한 언행을 대했을 때이다. 상대방과 헤어진 후 면전에서 가까스로 참았던 불쾌감이 가슴 속에서 스멀스멀 치밀어서 삭일 수 없는 분노를 느낀 적도 있었다. 당시엔 ' 예의를 모르는 사람이니 언행을 함부로 행하지 않을까.' 이 생각 때문에 그 자리에서 마음의 규각(圭角)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했다.

대인 관계 시 상대방이 자신을 존중하지 않을 때만큼 마음 상하는 게 없다. 더구나 진실을 짓밟혔을 때는 더더욱 상처를 받기 마련이다. 아무리 거짓과 허위가 난무하는 세태라고 하지만 진실은 존재하잖은가.

며칠 전 일만 해도 그렇다. 5일장이 서는 재래시장을 찾았다. 5월이지만 요즘 일교차가 심하다. 바람까지 몹시 불어서인지 장바닥에 앉아 노점을 벌인 상인들이 서늘한 날씨 탓에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저만치 오이, 상추 등, 온갖 푸성귀를 작은 바구니에 담아놓고 파는 어느 할머니께 시선이 머물렀다. 그분은 먼발치에서 봐도 유난히 안색이 창백해 보였다. 순간 돌아가신 친정어머니 모습이 그 할머니 얼굴 위에 오버랩 되었다.

발길이 절로 그 할머니 노점 앞에 멈췄다. 그리곤 오이 가격을 묻자 만 원에 14개라고 한다. 할머니는 첫 개시니만큼 바구니에 담긴 오이 말고 큰 비닐봉지에 담긴 오이를 고르란다. 또한 첫 손님이라서 1개를 덤까지 준다고 했다

할머니의 그 말에 다소 실한 것으로 골라서 만 원어치를 샀다. 그리곤 장바구니에 담긴 오이의 개수가 정확히 맞는지 셀 때이다. 할머닌 본인이 직접 개수를 확인해야 한다며 갑자기 장바구니를 매몰차게 빼앗았다. 그리곤 세기 시작했다. 이를 보다 못한 곁에 있는 어느 상인 아주머니가, "일부러 할머니 물건을 팔아주려고 온 것 같은데 아무렴 주지 않는 물건을 더 가져가겠어요·" 라고 한다.

그 분은 필자의 진심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할머닌 장바구니에 담긴 오이가 총 14개임을 확인하자 머쓱한 표정으로 약속했던 오이 1개를 덤으로 준다. 하지만 필자는 애초 그 오이 1개를 더 챙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할머니 호의를 한사코 뿌리쳤다.

집에 돌아와 장에서 사 온 오이로 피클을 담갔다. 다시금 오이를 대하자 종전에 시장에서 겪은 일이 진심이 외면 당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왠지 마음이 썩 유쾌하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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