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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26.04.20 17:03:14
  • 최종수정2026.04.20 17:03:14

한기연

음성문인협회장

살다 보면 삶의 마디마다 이름표를 붙여야 할 때가 있다. 이번 제주 여행은 '쉼표'이자 '마침표'로 부르고 싶다. 평생을 한 직장에서 일했던 남편의 퇴직을 앞두고 오래전 2박 3일을 비워 두었다. 남편이 비행기를 타는 것은 이십 년도 더 된 듯하다. 뜨고 내릴 때의 두려움도 이겨내고 제주로 향했다.

3월 첫날의 바람은 거셌다. 착륙을 앞두고 비행기가 흔들리며 다시 상승했다. 남편은 두 눈을 꼭 감고 있었고, 나는 손을 꼭 잡아주었다. 비바람이 부는 날씨 탓에 첫날은 숙소에서 거센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를 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래도 맛있는 음식을 먹고 지나온 얘기를 나누며 여행을 즐겼다. 남편과 마주 앉아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얘기한 게 언제인지 아득했다. 운동 코치로 시작한 직장생활이 녹록지 않았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중간에 그만두고 싶어 했을 때 위로하며 버틴 것이 정년이라는 값진 결과를 가져왔다. 그게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이름인지 안다. 그래서 잘 참아준 남편에게 고맙다.

다행히 다음 날은 우도로 떠날 수 있었다. 제주도는 여러 번 와 봤지만 우도는 처음이라 기대되었다. 걸어서 다니기에는 힘들 것 같아서 우도의 명소를 돌아보는 순환버스를 탔다. 내리고 싶은 곳에 내려서 아름다운 경치를 만끽했다. 에메랄드빛으로 빛나는 바다와 깎아지른 듯한 바위의 절묘한 조화가 경이로웠다. 제주는 그 어느 곳을 둘러봐도 자연의 신비로움이 넘쳤다. 쉼 없이 달려 온 시간 앞에서 잠시 멈추듯 여유를 부렸다. 일상의 다툼이나 속상했던 감정이 파도에 쓸려나가는 듯하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서로에게 닿는다.

정년퇴직하는 이들은 수십 년간 매일 아침 자신과의 약속을 지켜낸 성실함과 인내심이 바탕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가장으로서의 무게감을 견디고 끝까지 책임을 다한 모든 이들이 존경스럽다. 퇴직이 두 달도 안 남았다. 이제 큰 고개를 눈앞에 두었으니, 남은 날들은 부디 아무런 파도 없이 잔잔하고 평온하기만을 간절히 기도한다. 30여 년을 쉼 없이 달려온 남편이 건강하고 무탈하게 남은 생을 함께 하길 바랄 뿐이다.

제주에서 많은 것을 보고 공감했다. 돌담 사이 피어난 강인한 꽃, 거친 파도를 온몸으로 받아내는 해녀의 숨비소리, 그리고 수천 년을 견뎌온 오름의 묵묵함까지. 그 모든 것들이 남편의 삶과 닮아 보인다.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키며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지탱해 온 그의 시간이 제주라는 큰 자연 안에서 위로받는 느낌이었다. 진심을 담아 건넨 말은 제주의 노을 속으로 조용히 스며들었다. 해가 지는 것이 끝이 아니라, 내일은 또다시 해가 떠오른다는 생각이 스친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남편의 걸음걸이가 한결 가벼워졌다. 정말 수고 많았다고 이 세상의 남편이자 아버지들에게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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