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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26.04.19 15:24:18
  • 최종수정2026.04.19 15:24:18

최은희

청주복지재단 상임이사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는 1897년부터 1945년까지, 식민지라는 격동의 세월을 견뎌낸 민초의 삶을 장대하게 그린다. 책을 읽기 전에는 최서희를 주인공으로 생각했는데, 5부 20권에 달하는 책장을 넘기다 보면 최서희 못지않게 가슴 묵직하게 다가오는 인물이 여럿이다. 그중 한 명이 바로 조병수다.

조병수는 최참판댁 재산을 강탈한 조준구의 아들로, 척추장애(곱추)를 갖고 태어났다. 탐욕의 화신인 조준구에게 아들이란 가문의 수치이자 제거해야 할 오점이었다. 그는 폭언과 폭력을 일삼았으며 아들을 '투명인간', '괴물'로 취급하였다. 인권의식이 낮은 시대상을 고려하더라도, 가장 안전해야할 가정에서부터 철저히 유린당한 그의 삶은 그 자체로 비극이다.

조준구가 엄청난 빌런이라서 조병수는 등장한 후 곧 사라질 인물쯤으로 생각되지만 소설 중반부 소목장(小木匠)이 되어 다시 등장한다. 그는 세상이 자신을 '이상한 것'이라고 조롱할 때 '사람'으로 대해준 서희, 동병상련에서 오는 외로움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아본 길상, 그리고 목공의 길로 인도한 혜관스님의 따뜻한 시선을 딛고 일어서, 굽은 등으로 딱딱한 나무를 깎으며 살아가는 생명력 있는 단단한 존재가 되었다.

조병수의 존재감은 요즘 표현으로 직업재활을 통해 장애를 극복한 것도 있지만 그보다 그를 구박한 세상을 향한 '원망'보다 '초월'을 택했다는 점에 있다. 그는 자신을 가장 모질게 학대하고 괴롭혔던 아버지를 외면하지 않았고, 아버지의 볼모가 되어 죽을 때까지 책임짐으로써 신체적 한계에 갇히지 않는 인간 정신의 고귀함과 위대함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흔히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고 말한다. 조병수의 삶은 이 격언에 내포된 치명적인 편견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개인적 욕망과 탐욕으로 점철된 정신을 가진 조준구보다, 굽은 등으로 나무를 다듬는 조병수는 훨씬 더 명징한 정신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에게 장애는 극복해야 할 '불행'이 아니라, 인간이 가진 수만 가지 '특성' 중 하나였을 뿐이다.

장애인의 날을 맞아, 소설 속 조병수가 한 말을 다시 생각해 본다. "내 이 불구의 몸은 나를 겸손하게 했고 겉보다 속을 그리워하게 했지요. 모든 것과 더불어 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나는 물과 더불어 살게 되었고 그리움, 슬픔, 기쁨까지 그 나뭇결에 위탁한 셈이지요."

비뚤어진 세상에서 곧은 마음으로 살기란 어렵다. 겉모습에 매몰되어 정작 내면의 결을 놓치고 사는 우리에게, 조병수는 묻고 있다. 우리는 장애 유무와 상관없이 건강한 정신을 갖고 있는지· 타인의 겉모습 너머, 그 속에 깃든 존엄함을 그리워하며 살고 있는지· 아니, 스스로 갖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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