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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26.04.12 16:05:02
  • 최종수정2026.04.12 16:05:13

심재숙

시인·한국어 강사

무말랭이차를 우린다. 큼직한 주전자에 손수 덖어서 만든 갈색 무말랭이를 넣는다. 아껴 마시느라 냉동실에 보관해 두었던 것을 꺼낸 것이다. 찻물이 끓으며 주전자 귀때로 하얀 이야기보따리가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다.

부모님이 생각날 때, 특히 어머니가 그리울 때면 들르는 곳이 있다. 나에게 유일한 위로가 되는 방법 중 하나다. 그곳은 바로 주전자 닮은 노부부가 오래전부터 꾸려나가는 소박하고 아담한 순두붓집이다. 주전자에 무말랭이차를 우리며 뿌옇게 피어오르는 하얀 김 속에 그리운 것들이 수채화처럼 번진다. 어머니의 따뜻한 미소와 순두붓집 풍경 속 노부부의 따스하고 정겨우며 넉넉하고 푸짐한 식탁이 어우러진다.

구순 노모가 병상에 계신 이후로 이번에는 꽤나 오랜만에 순두붓집을 찾은 셈이다. 기력이 쇠해진 어머니가 뒷동산에 핀 산벚꽃을 보면서 가끔 이야기를 건넨다.

조금 이른 점심시간에 순두붓집 문을 열자 여전히 노부부가 반겨주신다. 이 식당은 어머니처럼 등이 굽은 부부가 두부를 직접 만들며 메뉴는 '순두부' 하나뿐이다. 게다가 밥과 푸짐한 나물 반찬과 고추장에 참기름이 나온다. 단골손님들이 어머니 손맛이 담긴 행복한 밥상을 마주할 수 있는 곳이다. 할아버지는 한쪽 다리를 절며 일을 하시고, 할머니는 허리가 기역자로 굽어 거동하기가 불편해 보인다. 하지만 두 분의 밝은 미소와 따뜻한 정은 가족처럼 살갑기 그지없다.

노부부와 안부를 나누며 순두붓집에 들어서니 큼직한 꽃다발이 반긴다. 안개꽃과 빨간 장미가 어우러져 고운 꽃다발이다. 나는 크게 웃으면서 감탄사를 연발하고 휴대폰 카메라를 켜서 그 꽃을 여러 컷 찍었다. 꽃다발이 큰 주전자에 꽂혀 있었기 때문이다. 생각지도 못한 주전자 화병에 특별한 이유도 없이 감동이 느껴졌다. 참 좋은 아이디어라고 말씀드리자 노부부는 부끄러워하시며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만담을 하듯이 한 마디씩 건넸다. "내가 꽃이 먼 중 알아유·", "아유, 시상에 꽃이 금방 시들어유. 아까워서 당장 꽃병은 없구. 주전자가 보이길래 그만." 두 분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귀한 마음까지 느껴져 가슴이 뭉클했다. 화병이 된 주전자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주문한 음식이 식탁에 차려졌다. 늘 그랬듯이 음식이 푸짐하게 나왔다. 주전자 이야기를 나누며 웃음꽃을 피우던 참이었는데, 공교롭게도 식탁 위에 또 다른 주전자가 놓여있는 게 아닌가. 귀엽고 앙증맞은 주전자였다. 주전자 뚜껑 위에는 큰 손 글씨로 '참기름'이라는 글자가 붙어있었다. 정겨운 글씨를 보고 있는데, 할머니로부터 직접 농사를 지어서 짠 참기름이라는 설명이 보너스처럼 따라왔다. 흔히 접하는 기름병이 아니라 주전자가 좀 생경하게 보였지만 어느새 따스함이 전해졌다.

흔한 화병이나 기름병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기분 좋은 상상을 해 본다. 아울러 어린 시절 들밥을 광주리에 이고 가던 어머니와 주전자를 들고 따라가던 내 모습이 팽팽한 기억으로 되살아났다. 절로 어머니와 넉넉한 인심의 주전자를 닮은, 우리들의 부모님 같은 노부부의 정겨운 삶에 건강과 행복이 함께하길 기원하는 주문이 나왔다.

무말랭이차가 갈색으로 우러난다. 주전자 귀때로 구수한 차의 향내가 편안하고 아늑한 마음을 선사한다. 좋은 생각을 그리며 차를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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