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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익현

건축사

산수유 노란 꽃망울 터뜨리더니 이에 질세라 청매(靑梅)도 서둘러 피면서 봄이 왔다. 집 가까이 즐길만한 매화가 없어 올해도 대전 '동춘당(同春堂)' 매화나무 옆에서 봄을 맞았다. 동춘당은 송시열과 더불어 노론을 이끈 송준길의 호이면서 당호(堂號)다. '동춘(同春)'은 문자 그대로 '만물과 봄을 함께 한다'는 뜻이다.

매화가 빛을 잃어갈 무렵 벚꽃이 눈부시게 피어났고 돌담 너머엔 개나리, 산에는 진달래가 점점이 분홍 물감을 뿌렸다. 꽃이 절정이니 덩달아 봄도 절정이다. 꽃에는 벚꽃처럼 절정을 금세 알 수 있는 꽃도 있고, 동백, 배롱 꽃처럼 오랜 기간 피고 지기를 반복하여 언제가 절정인지 가늠하기 어려운 꽃도 있다.

꽃은 올해도 내년에도 여전히 피어 절정을 이루겠지만 인간은 그렇지 못하다. 당나라 유정지는 그의 시 '대비백두옹(代悲白頭翁)'에서 인생의 덧없음을 이렇게 읊었다.

해마다 피는 꽃은 서로 비슷하건만

해마다 사람 얼굴은 같지 않다네

年年歲歲花相似 歲歲年年人不同

꽃의 절정을 보며 문득 사람의 삶에서 '절정'을 생각한다. 배드민턴 안세영 선수는 배드민턴 선수의 전성기가 30대 아래인데 농구는 30살부터 전성기라는 말을 듣고 부러워했다고 한다. 사람도 각자 전성기(절정)는 다르다. 절정을 뜻하는 '클라이맥스(climax)'는 그리스어로 '사다리', '계단'을 뜻한다. 사다리가 그렇듯 한 칸, 한 칸 오르다 보면 절정(정점)에 이르게 된다. 누구나 인생의 절정은 있다. 다만 모르고 지나치거나 너무 오래 붙들고 싶어 하는 것뿐이다. 절정의 시간은 찰나라서 빠르게 지나간다.

우리의 지혜라면 인생의 절정을 한 번이 아니라 수시로, 아니 매일 매일을 인생의 절정으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바로 '지금, 여기'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존 키팅 선생이 학생들에게 가르친 경구, '지금 이 순간을 즐겨라'라는 'Carpe Diem'. 올지도, 안 올지도 모르는 미래의 행복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는 것은 어리석다. 나이 든 사람들이 흔히 범하는 '경험'에 갇히는 오류, 자신이 만들어 놓은 감옥에서 나오는 지혜가 필요하다.

어린 시절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6남매가 북적거렸던 시골집, 그 후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고 부모님과 6남매, 6남매의 배우자와 자식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던 명절날. 그때가 어쩌면 내 인생의 절정 중 하나였을지 모른다. 부모님과 형님 두 분이 세상을 떠나신 지금, 생각해 보면 모든 '그때'가 절정이었다. 지금이 우리 인생의 절정이고, 오늘이 바로 내 인생의 절정이다. 그래서 인생의 절정은 하나가 아니라 매일 매일의 일상 속 어느 지점이 아닐지 ...

나이가 들었는데도 자기 인생을 증명하려는 사람을 보면 안타깝다. 상을 타려 하고, 직책을 맡으려 한다. 받은 상만큼, 맡은 직책만큼 마음은 더 소란스럽고 삶을 더 무겁게 할 텐데. 그것보다는 '나 정말 수고했다'는 자기 위안이, '잘 살았다'는 기억이 노년을 지탱하는 힘이 되고 지나온 여정(旅程)이 나를 설레게 한다.

절정에서, 꽃은 떨어져도 열매를 맺는다. 사람도 절정에서 내려오는 길이 마냥 쓸쓸하지만 않는 것이 살면서 얻은 지혜가 그저 그런 인생을 살지 않도록 나를 이끈다. 마음이 심란하면 나를 가만히 들여다본다. 지금 내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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