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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자

수필가

기억의 책장을 77년 전으로 거슬러 넘기면 그곳에는 언제나 뽀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연분홍빛 봄이 있다. 갓 부화한 병아리가 어머니의 날개 밑을 파고들 듯 나는 어머니의 치마꼬리를 꼭 쥐고 그 발치를 졸졸 따르던 작은 아이였다.

그 시절의 봄은 어머니의 얼굴을 많이 닮아 있었다. 어머니는 겨우내 마른 가지를 견디고 가장 먼저 고고하게 고개를 내미는 매화꽃 같았다. 어머니의 은은하면서도 강인한 그 향기는 어린 나의 코끝에 머물며 세상을 참으로 안전하고 따스한 곳임을 일러주었다.

담벼락마다 흐드러지게 피어난 노란 개나리꽃 무더기 속에서 내가 노란 병아리인지 개나리가 나인지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사람 속에 푹 파묻혀 지냈던 시절 그때의 봄은 결핍도 시련도 없는 완전한 축복의 계절이었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에도 분명 시샘하듯 찾아오는 꽃샘추위와 잎샘추위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린 내가 기억하는 삶은 온통 행복의 색채뿐이었다. 나무가 자라기에 딱 알맞은 햇살과 적당한 비가 내리는 숲처럼 나를 둘러싼 환경은 오직 '성장'만을 위해 존재하는 듯했다. 꽃이 피는 것을 시샘한다는 꽃샘추위도 새잎이 돋아나는 것을 질투한다는 잎샘 추위도 어린 나의 피부에는 닿지 않았다.

그것은 어머니라는 커다란 울타리가 그 모든 칼바람을 온몸으로 막아주고 계셨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나는 추위를 배우기보다 온기를 먼저 배웠고 세상의 날카로움보다 꽃잎의 부드러움을 먼저 익혔다. 그 조건 없는 사랑은 내 인생의 뿌리를 깊게 내리게 한 자양분이었다.

그 따뜻한 봄날로부터 어느덧 77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다. 지금의 나는 마치 단단하게 얼어붙은 겨울 땅 속에서 조용히 웅크리고 있는 한 알의 씨앗과도 같다. 겉으로는 고요하고 멈춘 듯 보이지만, 그 속에는 여전히 가느다란 숨이 이어지고 있다.

젊은 날의 화려했던 봄날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때로는 삶의 무게가 얼어붙은 흙처럼 나를 짓누르고 다시는 꽃을 피울 수 없을 것 같은 막막함이 찾아오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지금 내가 고요히 고르고 있는 이 숨은 단순히 연명하기 위한 호흡이 아니라 두꺼운 지표면을 뚫고 나가기 위해 안으로 응축하고 있는 힘이라는 것을.

77년 전 어머니가 보여주셨던 그 강인한 매화의 정신이 내 혈관 속에 여전히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다시 봄을 맞이하려 한다. 몸은 예전처럼 가볍지 않고 주변의 공기도 아직 차갑지만 내 안에 깃든 기억들은 여전히 따스한 동력이 된다. 언 땅을 밀어 올리는 것은 다름 아닌 부드러운 새순의 힘이다. 가장 연약해 보이는 것이 가장 단단한 흙을 뚫고 나오는 역설 그것이 바로 생명의 신비일 것이다.

나는 이제 서두르지 않고 멈추지도 않고 나에게 주어진 '봄'을 향해 나아가려 한다. 어머니의 치마꼬리를 잡던 그 순수한 마음으로 다시 한번 세상 밖으로 고개를 내밀 준비를 한다. 77년 전 봄이 주어진 선물이었다면 이제 내가 맞이할 봄은 긴 시간을 견디며 스스로 일궈낸 정원이 될 것이다. 매화꽃이 피어나고 개나리가 손짓하던 그 길 위에서 나는 다시 한번 나만의 꽃으로 조용히 피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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