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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화

무심수필문학회 회장

어느 문학회 이취임식에 초대받았다. 잦은 행사 장소로 익숙한 장소, 적당히 넓은 공간에 문향이 가득하다. 빈자리가 보이지 않을 만큼 많은 문인과 내빈들이 참석했다. 모르는 분들이 대부분인 가운데, 안면이 있거나 활자를 통해 뵈었던 분들도 계셨다. 지역의 많은 문인이 함께 한 자리가 하나의 풍경으로 다가왔다. 반갑게 주고받는 인사가 봄밤을 환하게 밝혔다.

칠십여 년 이어온 문학회 분위기를 감상하며 시간의 깊이를 가늠해 보았다. 차분하게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앞쪽 중앙 테이블이 시선을 끌었다. 대각선 방향 맞은편에 선배 문인들이 앉아계셨다. 오가는 정담이 작은 수런거림으로 들리는 다른 테이블과 달리 조용한 그 자리에서는 색다른 무게감이 느껴졌다. 단상을 향해 고개를 들 때마다 자연스레 그쪽 테이블에 눈길이 머물곤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내 시선의 끌림은 고요히 흘러나오는 빛에 의한 것이었음을 알아차렸다.

시대사조를 공유하며 오랜 시간 같은 길을 함께 걸어온 분들의 고유한 풍취일까·

말없이 담담하게 앉아 계신 자리에서 은은한 빛이 느껴졌다. 어쩌면 긴 시간 속에서 다져진 아우라(aura)였는지도 모르겠다. 소리 없이 퍼지는 환한 빛에서 문득 가로등을 떠올렸다. 대낮처럼 밝은 LED 등이라기보다, 정감 있게 퍼지는 노란 수은등 불빛을….

어두운 밤을 밝히는 가로등은 제 자리에서 지켜본 과거의 시간을 간직하고 있으리라. 도심의 골목길에서도 한적한 시골길에서도, 지나온 시간 속에 켜켜이 쌓인 무수한 발걸음에 담긴 저마다의 애환을 마주했으리라.

빛은 어둠을 밀어내지 않는다. 자연의 순환에 순응하며 어둠과 공존한다. 그리고 어둠 속에 가려진 미지의 세계를 드러내 보여준다. 저녁 어스름이 내려앉기 시작하면 가로등 불빛이 하나씩 켜진다. 작은 불빛이 하나하나 이어져 불편한 밤길의 조력자가 된다. 묵묵히 한 자리를 지키며 보이지 않는 대상에 대한 불안감을 덜어주기도 한다. 그렇게 누군가의 필요성을 채워주며 존재의 의미를 쌓아간다.

문학기행을 앞두고 사전 현지답사를 갔다. 백제 시대의 역사와 문화에 조예가 깊은 분이 바쁜 일정을 접어두고 기꺼이 동행해 주셨다.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백제의 옛 땅을 거니는 동안 또 하나의 가로등이 켜졌다. 덕분에 봄빛이 번지기 시작한 산야에서 수 세기를 거스른 시간의 흔적을 더듬어보았다. 고고한 가로등 불빛이 긴 세월을 투과해 아스라한 골목길을 비추었다. 순간 눈앞에 펼쳐진 것은 화창한 봄 풍경만이 아니었다. 조용히 번지는 연둣빛 향연 속에 이루지 못한 백제 유민의 여망이 아스라이 보이는 듯했다. 애달픈 역사가 스며있는 봄빛이 더욱 찬연하게 가슴을 파고들었다.

아쉬움과 충만함이 교차했던 하루를 정리하는 밤, 오늘 여정의 여운으로 잠자리에 들며 책을 골랐다. 십여 년 전 출간된 책이 환한 가로등 불빛으로 부흥 백제의 길을 비춰준다. 역사의 뒤안길에서 조용히 빛나는 선인들의 발자취를 좇다가 문득 부끄러움을 느꼈다. 아직 발을 들이지 않은 골목을 발견한 것이다. 조도 높은 불빛을 따라 다시 걸음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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