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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26.04.02 17:51:19
  • 최종수정2026.04.02 17:51:19

최한식

수필가

◇노인복지관 앞에 연세 지긋한 여성분이 계시네요. 안녕하세요? 몇 말씀 나눌 수 있으실까요?

△나요? 별로 할 얘기가 없는데. 시간은 있으니 뭐든 물어보셔.

◇예, 실례가 아니라면 연세가 어떻게 되시는지…?

△1944년생이니 우리 나이로 여든셋, 만으로 여든 둘이네.

◇이렇게 고우신 걸 보면 부잣집에서 귀하게 자라셨나 봅니다.

△모르는 소리, 만고풍상이라던가· 평생 고생만 했어.

◇1970년대까지 나라가 다 어려웠으니 그러실 만 하네요.

△내 일곱 살에 난리가 났어, 아버지는 "보도연맹"이라나 뭐라나, 끌려가 죽었대. 그때 스물 예닐곱이셨을 텐데, 죄 없는 양반을 그냥 죽인거래. 죽은 사람만 억울하지.

◇그럼 가정형편이 말이 아니었겠네요?

△전쟁 나 피난 간 곳에서 어머니가 상이군인한테 끌려갔어. 그때는 법도 없었나봐.

◇서로 좋아 그런 게 아니고요?

△도망쳐 온 걸 그 자가 쫓아와 짓두들겨 패고 또 끌고 갔어. 젊고 예쁜데다 남편 없는 거 알고 끌어간 거지.

◇그때 가족은 어떻게 되셨어요?

△아버지 돌아가시고 어머니 끌려가고, 외할머니와 동생, 나 그렇게 셋이었지.

◇외할머니는 어떤 분이셨어요·

△학살당한 시신들 속에서 사위를 찾아내 묻어주고, 손녀손자를 거둔 정 많고 억척스런 분이셨어.

◇그나마 할머니 때문에 살 수 있었던 거네요.

△할머니마저 두 해쯤 지나 돌아가시고 동생과 나는 친척집에 따로 맡겨졌어. 그때 학교를 그만둬서 초등학교 4학년이 내 최종학력이여.

◇그래도 학교는 다니셨어야지요?

△누가 그걸 모르나, 형편이 안 되니 그랬지. 어려울 때 더 싸우잖아. 어른들이 나 때문에 싸우는 것 같아 못 견디겠더라고.

◇그때는 취직할 곳도 만만치 않았을 것 같습니다.

△없었지, 잘 해야 식모살이, 가정부지. 내가 어리숙해 갇혀서 식모살이 하다 옆집 색시하고 도망을 쳤는데 그 색시가 내게 사기를 쳤어. 겨우겨우 강원도에서 또 식모살이 했지. 결혼 전까지 그렇게 살았어.

◇그럼, 좋은 신랑 만나 팔자 펴신 건가요?

△남자라면 다 겁났어. 아버지 잡아가고 어머니 끌고 가고, 밤에 내 방에 나타난 것도 남자고, 의붓아버지 행패도 무서웠거든.

◇결혼은 어떻게 하신 건가요?

△어찌어찌해서 어머니께 오게 됐어. 의붓아버지가 있는 집이지. 불편해서 살 수가 있어야지. 어머니는 나를 결혼시키고 싶은 눈치셨어. 어머니와 남동생이 신랑 될 사람 데려오고 사주보고 밥 한번 먹고 사진 찍자더니 그게 약혼사진이래, 밀어붙이는 통에 그냥 결혼했어. 당시로는 늦었다는 스물여섯이었지, 아마.

◇신랑은 착실한 사람이었나요?

△내 복에 무슨, 일하기 싫어하고 술 잘 먹고 싸움 좋아했지.

◇신랑 분은 건강하게 생존해 계시나요?

△얼마 전부터 주로 누워만 있어, 그래도 말이 얼마나 센지 몰라. 그래서 참, 내가 국가자격증을 땄어. 요양사자격증, 지금은 내가 남편을 돌보고 있지. 그 자격증 딴 게 정말 자랑스러워.

◇노인복지관은 어떻게 오시게 된 건가요?

△이런 게 있는지도 몰랐는데, 자원봉사를 하는데 한 분이 가르쳐주었어. 못 배운 게 한인데 뭔가 가르쳐 준대서 왔더니, 엄청 좋아. 사는 것 같아.

◇이야기를 듣고 보니 참 한이 많으실 것 같네요.

△다 지나간 일이여. 내 팔자려니 하고, 이제 그냥 즐겁게 살려고 해.

◇젊은이들에게 한 마디 하신다면…?

△뭔 얘기를 햐, 다 지나가는 거고 살다보면 좋은 날이 와.

◇역사 속 힘든 시절이 오래된 애기가 아니었습니다. 우리 모두 이 어려운 시기를 잘 견디기 바랍니다. 곧 좋은 때가 올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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