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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26.04.02 15:09:09
  • 최종수정2026.04.02 17:23:31

정초시

후마니타스 포럼 대표

2월 28일 시작된 전쟁이 벌써 한 달을 넘기면서 점점 수렁에 빠져들고 있다. 심지어 승자가 누가될지도 불분명할 뿐만 아니라 모두가 모두가 패자될 것이 거의 확실시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잃고 있는지를 냉정하게 살펴볼 때가 된 것 같다.

인간이 오랜 역사 속에서 쌓아왔던 문명은 따지고 보면 편리성을 증진시키는 방향으로 발전하여 왔다. 경제적 풍요도 편리성이 점점 증진되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인간 존재 및 행동의 당위성에 대한 철학적 사유와 사회문제에 대한 깊은 성찰은 점점 사소한 덕담수준으로 전락해버렸고, 사회는 오직 경제적 풍요를 바탕으로하는 화폐가치 하나로 단일화되는 느낌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경제적 풍요는 다름아닌 석유기반의 에너지 및 부산물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번 전쟁을 통해서 우리의 문명이 얼마나 부실한 기초 위에 세워져있는지를 깨닫게 된다. 즉, 석유라는 검은 액체가 얼마나 우리의 삶 속에 깊숙히 침투해 있으며, 전쟁으로 인한 석유의 수급불안정성이 우리의 삶 자체를 뒤흔들 수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그렇다면 석유는 인간의 문명에 얼마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가·

최근 호루무즈해협이 봉쇄되고 후티반군에 의해 홍해가 봉쇄될 것이라는 위협 가운데 석유 및 석유 부산물에 의존하던 문명에 대한 근본적인 위험신호가 감지된다. 일차적으로 유가 급등으로 인해 비용상승과 수요위축 등으로 스태그플레이션 위험이 점증하고 있는데, 이는 단지 우리나라 뿐 아니라 세계적인 경기침체로 확산될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오늘날 문명이 지나치게 석유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선 원유를 정제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나프타 및 기본화합물은 우리의 일상을 거의 점령하고 있다. 나일론과 폴리에스터와 같은 합성섬유는 상당부분 면화, 양모, 실크 등의 천연섬유를 대체하고 있으며, 인조섬유는 내구성이 뛰어나 자동치시트, 카펫 등 생활필수품으로 자리잡고 있다. 여기에 폴리에틸렌이 가볍고 내구성이 있는 용기로 재탄생되면서 플라스틱시대를 열었으며, 이는 다시 일회용품의 개막을 알렸다. 비닐봉지, 각종 용기, 장난감, 가전제품 및 스마트폰 외관 등, 플라스틱 없는 세상은 상상하기 어렵다. 2차대전 이후 농업혁명의 주역은 질소 및 요소 비료였는데, 이것 역시 원유 부산물에서 나온다. 제약산업에서 사용하는 핵심원료의약품 및 시약의 99%는 석유화학 공정에서 파생되는 화합물에 기반을 두고 있다. 특히 한국처럼 제네릭 의약품이 주종을 이루는 경우 원유수급의 애로는 곧바로 생산에 타격을 받게 된다.

그런데 더 큰 문제의 심각성은 우리가 전쟁을 바라보는 관점에 있다. 전쟁을 마치 가상의 게임처럼 대하거나 자신이 투자한 주식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사람도 많다. 즉, 방산 관련 주식에 투자한 사람은 전쟁이 끝나기를 원하지 않을 수 있으며, 전쟁으로 인한 심각한 파괴는 건설에 대한 새로운 수요창출을 기대한다. 전쟁을 생명을 앗아가는 참혹한 수단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화폐가치 증식을 위한 새로운 투자수단으로 본다. 생명의 소중함이 상실되었다. 수천년동안 인간이 축적해왔던 지적 자산들, 자유, 평등, 박애, 포용과 환대, 협력 등의 고상한 가치들은 화폐가치로 환원되어 공허한 외침으로 남는다.

유한한 석유자원에 의존하고 있는 문명은 항상 위기의 조짐은 있었으나 편리함 때문에 미루다가 극단의 위험을 맞을지도 모른다. 지금이라도 불편을 감수하더라도 우리의 삶의 방식을 바꾸고 인간 모두가 공존할 수 있는 오래된 가치를 다시 세워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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