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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우의 그림이야기 - 20세기 마지막 선비서화가 강암 송성용

  • 웹출고시간2026.04.02 18:02:42
  • 최종수정2026.04.02 18:0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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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가 강암 송성용

ⓒ 강암서예관
이미지 메이킹(Image Making)이라는 용어가 있다. 자신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전달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외모, 태도, 행동, 말투, 그리고 스타일 등을 관리하고 설계하는 것을 말한다. 즉 대중이나 타인에게 긍정적이고 원하는 인상을 심어주기 위한 전략이다. 이미지 메이킹에 성공한 대표적인 사람은 자신이 직접 디자인한 흰옷을 하루 2번씩 갈아입었던 앙드레 김, 검은 터들넥과 청바지를 입고 운동화를 신었던 스티브 잡스와 중화복을 입은 등소평 등이 있다.

본인은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평생 상투를 틀고 한복을 입어 이미지 메이킹에 성공한 강암 송성용(剛庵 宋成鏞, 1913-1999)이라는 서예가가 있다. 수많은 서예가 중에 이름을 날릴 수 있었던 것은 작품이 뛰어나기도 했고 특이한 외모 덕을 봤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는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 시대로 가거나 민속촌이나 사극에서 볼 수 있는 두발과 옷차림이었다. 서예뿐만 아니라 민족의식이 강한 유학자로서 일제 강점기에는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그는 "시대가 달라졌는데 왜 불편하게 사느냐?"는 질문에 "나를 평생 지켜준 게 갓과 상투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죽기 직전까지 늘 상투와 한복을 지키며 한평생 선비로서의 강직함을 지키며 살았다. 상투와 갓을 쓰면 선비다운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강암의 지론이었다. 그는 1980년 일본 미술계를 둘러보고자 여권 사진이 필요할 때 갓을 벗고 사진을 찍어야 한다면 일본행을 취소하겠다고 고집을 부렸을 만큼 대쪽같은 선비였다.

강암 송성용은 유학자 유재 송기면(裕齋 宋基冕, 1882-1956)의 3남으로 김제에서 태어났다. 52세 때 전주시 교동으로 이사해 살다가 8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지인들이 심우장(尋牛莊)을 지어 만해 한용운(1879-1944)을 살게 한 것처럼 강암도 친구들 덕분에 전주 아석재(我石齋)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1965년 친구들이 나서서 강암의 서예 전시회를 열어주고 그 작품들을 모두 사주거나 팔아주었다. 그 작품 대금으로 집을 구입해서 김제에 살고 있던 강암을 전주로 오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를 볼 때 강암은 인간관계를 잘하고 친구 복이 많았던 것 같다.

강암이 33세가 되던 해인 1945년 해방을 맞이하게 된다. 미술계에서 일본풍 탈피와 민족미술이 대두되던 시기였다. 하지만 강암은 외부 세상에 아랑곳하지 않고 의관을 정제한 채 서예연마에 힘써 서예는 물론이고 문인화에 일가를 이룬다. 1956년 한국전쟁이 끝나고 주변의 권고에 못 이겨 은둔고수 강암은 1955년(44세) 5회 국전에 작품을 출품해 입상함으로써 뒤늦게나마 중앙 서단에 이름을 알린다.

배원정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는 "강암 송성용은 고전의 학문 사상과 서법을 계승하면서도 전통에 매몰되지 않고 당대의 시대정신을 예술로 승화시키기 위해 그는 전, 예, 해, 행, 초 등 다양한 서예작품으로 변화를 시도했다. 문인 정신이 깃든 대나무 그림에 특장이 있어 시·서·화를 모두 겸비한 20세기 마지막 선비서화가로 평가받는다"고 했다.

이처럼 다양한 자체의 서예와 다양한 소재의 문인화를 최고 수준으로 도달한 작가는 광복 이후로 강암 이외에 찾기가 쉽지 않다. 필자는 강암의 글씨는 두 번 본 적이 있다. 전주를 방문하면서 시내 입구에 서 있는 일주문을 통과하면서 '호남제일문(湖南第一門)'이라는 대형 현판을 차 안에서 봤고 몇 년 전 경주여행 중 석굴암 일주문에 '토함산석굴암(吐含山石窟庵)'이라는 글씨를 본 기억이 난다.

강암의 작품은 호남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 비문, 현판 등이 산재해 있다. 위에서 이야기한 두 작품 외에도 내장산 내장사, 두륜산 대둔사, 불국사 자하문, 불국사 불국선원, 원각성존 소태산 대종사 비명, 연지문, 금산사 보제루, 백양사 화엄전, 화엄사 적멸당, 금오산 향일암, 동춘 송선생 유허비 등이 대표적으로 꼽힌다.

호남제일문(湖南第一門) 작품은 1994년 전주 월드컵로 확장 공사 때 전주시에 전달했는데 당시의 현판 조각가가 복사본으로 현판을 제작한 뒤 원본을 지인에게 건네면서 경매시장에 나와 화제가 되기도 했다.

강암은 작품 외에 농사 중에 가장 어렵다는 자식 농사에서도 대풍을 거둔 아버지였다. 1남 송하철은 전주시장(관선), 2남 송하경은 성균관대학교 교수(유학 대학장), 3남 송하춘은 고려대학교 교수(문과 대학장), 4남 송하진은 전주시장과 전라북도지사(민선)를 지냈고, 2녀 송현숙은 서예가(강암 서예관장)이다. 자녀들은 모두 아버지의 영향으로 글씨도 잘 썼다고 한다.

강암은 평생 모았던 작품들을 전시하고 서예를 체계적으로 진흥 보존해 후진을 양성하기 위한 '강암 서예관'과 '강암서예학술재단'을 설립한다. 1995년 전주한옥마을 전주천 옆 아석재 옆에 세워진 강암 서예관(剛菴 書藝館)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예 전문 전시관이다.

강암은 86세까지 장수하고 훌륭한 작품세계를 펼치며 자식 농사에서도 성공한 오복을 누리다간 보기 드문 작가이다. 많은 작가들이 부러워하고 따라가고 싶은 예술가인 것이다. 전주에 가면 한옥마을만 둘러보지 말고 강암 서예관을 꼭 방문해 강암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작품들을 감상하고 좋은 기운을 받고 오길 권하고 싶다. 인생은 짧지만 예술작품의 여운은 강하고 오래가는 것이다.

이동우

미술관장·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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