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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수필가

산수유가 피었다. 바람 끝이 쌀쌀한 저수지 언덕에서 봄이 오는 골짜기 풍경을 굽어보고 있다. 따사로운 볕을 이고 부얼부얼 핀 꽃이 올봄에도 변함없이 곱다. 지나갈 때마다 좁쌀 한 줌을 부풀려 놓은 것 같은 느낌이었지. 뒤미처 아지랑이처럼 떠오르던 노란 꽃노을.

알싸한 현기증이 봄 알레르기처럼 번져나간다. 볕이 따갑다고 느끼는 순간 노란 반점이 연달아 스쳐 갔다.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앉아 있으면 지워졌던 내가 채색이 된다. 얼마 후엔 세상이 밝아지고 다시 길을 가곤 하였다. 노란 빛깔 여운에 잠시 눈을 감는다.

얼마 후 어지럼증은 가셨다. 다시 길을 가다 보면 유채꽃마냥 흐드러진 냉이꽃이 띄었다. 빈혈에 시달리면서도 참 아름다운 정경이라고 생각했었다. 남다른 이미지 때문이었을까. 산수유 또한 눈앞이 빙빙 도는 느낌이었던 것을 보면.

봄 뜰은 노란 색부터 칠이 된다. 담장에서 망울을 터뜨리는 개나리꽃은 물론, 그 무렵 부화되는 병아리의 종종걸음에도 샛노란 빛깔이 묻어났다. 봄나들이 나온 햇병아리의 깃도 대부분 노란 색이다. 어미닭 품에서 삐약거리는 병아리가, 봄의 태 안에서 자란 새싹들처럼 앙증스럽게 느껴진 것도 봄 뜰이라는 공간에서의 일이었다.

노란 색의 이미지를 다시 떠올린 것은 달맞이꽃을 보고 난 직후였다. 풀벌레가 노래를 자아내는 초여름, 날개처럼 투명한 잎을 말릴 때마다 신비한 색감에 젖어든다. 맨 처음 축축했을 때의 연미색이 갈수록 진해지다가 나중에는 송홧가루 빛깔이 된다. 물기가 엷어질수록 진행되는 빛깔의 변화가 어린 마음에도 신기하기만 했다.

시월에도 샛노란 은행나무 물결에 휩쓸린다. 잎을 줍는다고 곰삭은 은행을 밟다가 독이 오르곤 했다. 금방 살갗이 발긋발긋해지고 가렵기 시작한다. 겨우내 그렇게 시달리다가도 이듬해 가을이면 또 그 전철을 밟는다. 독이 오를 걸 알면서도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필연이었던 것일까.

단련이 된 듯 건드리지만 않으면 별 탈은 없었으나, 그래서 더 거리낌 없이 은행잎을 줍는다. 지나친 아름다움이 독으로 번지는 것도 파악한다. 못 견디게 좋아하는 그게 치명적인 상처로 남기도 하는 걸 헤아린 특별한 체험이었다.

좀 더 자란 뒤 기억된 이미지라면'빈센트 반 고흐'가 그려낸 색깔이다. 가끔 우기기나 하듯 태양을 노란 색이라고 했던 그의 미적 감각을 돌아본다. 볕이 쨍쨍한 삼나무 길이나 해바라기 등을 보고 있으면 어떤 색의 개입도 허용하지 않는 완고함이 느껴진다. 중간색은 가끔 치졸한 문명의 그것으로 다가오는 느낌이었으나 고흐가 택한 노란색은 자연으로 다가가는 순수하고 맑은 빛깔이었다.

가장 원초적인 게 노란색이라면 나도 그 시점으로 돌아가고 싶다. 봄 역시 노란 빛깔로 1년의 시작을 알려 오지 않았던가. 어떤 색의 개입도 허용하지 않는 게 원색이라면 노란 색은 그중에서도 가장 오묘한 색감으로 기억되었던 것을.

수많은 색을 떨쳐버린 후라야 볼 수 있는 빛깔이 새삼스럽다. 1년의 시작이 바로 그 노란 빛깔이며 그로써 진정한 봄이 되는 것을 생각해 본다. 나 또한 처음을 향해 가는 주기적인 리듬을 찾을 거라고 다짐하면서.

눈을 드니 저수지가 파랗게 떠올라 있다. 물목으로 번진 산수유 가지에 봄이 잔뜩 어렸다. 미처 벙글지 못한 꽃망울 역시 남은 봄을 매단 채 하늘거린다. 뒤미처 들려오는 봄 마중물 소리까지 정겹다. 바람이 불 때마다 흐드러질 샛노란 꽃 여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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