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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복

수필가

봄이 오면 나는 산을 찾는다. 겨우내 기다린 꽃들을 만나기 위해서다. 잔설 사이로 피어오른 복수초와 노루귀, 그리고 현호색이 그립다. 해마다 때맞춰 증평 좌구산에 오르고, 괴산 각연사를 지나 오지마을 소전리까지 발걸음을 옮긴다.

봄을 만나는 일은 쉽지 않지만 몇 번이고 찾아가는 까닭은 습관처럼 그냥 해야만 하는 일이다. 산기슭 아래 계곡의 얼음이 사르르 녹아 흐르고 언덕에 핀 꽃들을 보노라면, 어머니가 지은 밥 냄새처럼 담백하고 고소한 봄 향기가 허공에 퍼진다.

어느 따스한 봄날, 그녀와 함께 센터 건물 뒤 죽천교로 산책하러 나갔다. 오래 걷지 못하는 그녀는 양지바른 곳을 찾았다. 그때 개천 언덕에 소리 없이 피어 있는 봄까치꽃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푸른 달빛을 지닌 작은 꽃이다. 우리는 망설임 없이 그 곁에 주저앉았다.

그녀는 좋아하는 놀이나 신기한 것을 보면 한 시간이 지나도록 집착한다. 아래턱을 조금 내민 채 꽃 앞에 앉아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작은 꽃들과 삶을 노래하고 있는 듯했다.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모습이 그녀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면, 나는 그녀를 일으켜 한 손에 팔짱 끼고 다른 한 손으로 팔을 받치며 반걸음 앞서 천천히 걷는다. 비 오는 날에 맥없이 땅바닥에 주저앉을 때면 나는 재빨리 오른발을 뻗어 그녀를 받친다. 바지가 젖지 않도록 하려다 보니 저절로 몸에 밴 동작이다.

그녀는 걷는 일이 유난히 힘들다. 힘든 이유에 알려고 하지 않는다. 다만 그녀가 잘 걸을 수 있도록 허리 중간쯤 손가락으로 지그시 누르며 척추를 올곧게 받친다. 조금이라도 덜 힘들길 바라면서 나는 그녀에게 속삭인다.

"천천히 가도 괜찮아. 나는 같이 걸어서 참 좋아." 그녀는 아무런 대답이 없다.

센터로 돌아오면 허리를 마사지해 준다. 오래 앉아 있거나 오래 걸으면 허리에 무리가 갈까 염려되어서다. 마치 먹고 자고 아프면 치료받고 약 먹는 것처럼 일상에서 그냥 해야 하는 일이라 여겨졌다.

그런데 문득, 그냥 해야만 하는 일이 의무적 행위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애써도 변하지 않는 현실 앞에서 세상의 모든 말을 모아도 설명되지 않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그래서 그냥 하는 일이 어쩔 수 없는 일로 여기고 있었다.

우리가 얼마나 새로워질 수 있는지 잠시 잊고 있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 관계를 맺고 사랑하는 일은 인연일 수도 있지만 그냥 해야만 하는 일이다. '어쩔 수 없이'가 아니라 '그냥' 해야만 하는 일로 의식될 때 비로소 삶의 의미가 달라진다.

그러고 보니 비단을 깔아놓은 것 같은 봄꽃을 보고 누군들 몰입하지 않겠는가· 봄까치꽃처럼 그녀는 말없이 자기 자리를 지킨다. 그녀에게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머물러 있는지 모른다. 나는 그녀의 목소리가 되어 주고 싶다. 그녀와 눈 맞추며 웃고 서로 위로가 되고 싶다.

그냥 사랑하는 일을 위해서 보고 웃는 오늘을 잊지 않기 위해 지금을 보듬는다.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우리만의 조용한 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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