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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26.03.05 14:09:49
  • 최종수정2026.03.05 14:09:49

박영순

'파란만장한 커피사' 저자

정치의 언어는 때로 대중의 인식을 바꾸는 기호학적 반전을 일궈낸다. 그중에서도 낡은 이미지를 허물고 새로운 정체성과 서사를 부여하는 리브랜딩(Rebranding)은 가장 극적인 현상이다. 요즘 한국 정치에서 눈에 띄는 기표는 '뉴(New)'라는 접두사이다. 자신을 반대했던 사람들의 마음을 풀어낸 동력은 땀 흘려 일하는 대통령의 모습 그 자체이겠다. 치열한 국정 운영과 진정성으로 진영의 벽을 허물고 중도층의 지지까지 끌어안는 흐름을 우리는 '뉴이재명'이라 부른다.

흥미롭게도 이념의 전장이 아니라 매일 마주하는 커피잔 속에서도 리브랜딩의 역사가 쓰이고 있다. 오랫동안 '고무 냄새가 나는 싸구려 커피'라는 낙인이 찍혀 있던 로부스타 종이 '파인(Fine)'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커피 시장의 견고한 위계를 무너뜨릴 태세다.

커피 시장은 아라비카 종을 정점으로 하는 이분법적 구조가 지배하고 있다. 아라비카 커피가 우아한 산미를 지닌 '귀족'이라면, 로부스타는 거친 쓴맛을 지우기 힘든 '서민'으로 취급받는 닫힌 구조이다. 향미 평 가시스템은 애초 아라비카에 유리하게 설계되어 로부스타의 잠재력을 구조적으로 소외시켰다. 100점 만점의 스페셜티 평가 기준은 아라비카의 화려함에 맞춰져 있어 로부스타는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불리한 경쟁을 강요받고 있다. 이는 특정 정치인이 '극단적 호불호'라는 굴레에 갇혀 역량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처지와 흡사하다.

그러나 영원할 것 같던 위계는 '생존의 위기' 앞에서 스르르 무너지고 있다. 기후 변화로 인한 커피 생산의 위기는 로부스타의 강인한 생명력을 주목하게 만들었다. 반전은 농장의 떼루아와 가공 방식의 혁신에서 시작되고 있다. 붉게 잘 익은 체리만을 골라내는 선별 수확을 도입하고, 아라비카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무산소 발효나 정교한 허니 프로세스 등 최신 가공 기술이 속속 로부스타에 적용되고 있다.

노력의 결과는 경이롭다. 로부스타 특유의 퀴퀴한 냄새는 자취를 감추고 에스프레소 추출 시 폭발하듯 뿜어져 나오는 쫄깃한 크레마와 묵직한 바디감, 구운 견과류의 고소함, 그리고 다크 초콜릿 같은 고급스러운 단맛이 우아하게 발현된다. 베트남에서는 이젠 어렵지 않게 파인 로부스타를 구할 수 있게 됐다.

정치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팍팍해진 민생의 위기 앞에서는 공허한 이념 논쟁보다 '내 삶을 실질적으로 바꾸는 효능감'이 절실해진다. 막연한 거부감을 접어 두고 실용주의적 성과에 지지를 보내기 시작한 '뉴이재명 현상'은 "시대의 갈증이 곧 대상의 본질을 재평가하는 마중물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극적인 변화를 수용하기 위해 인간은 기호학적 단절을 시도한다. 멸시했던 로부스타를 즐겨야 하는 인지부조화를 피하기 위해 '파인'이라는 단절적 기표를 떠올리는 것처럼 유권자 역시 반대했던 인물을 새롭게 지지하기 위해 '뉴'라는 기호를 씌웠다. 이 짤막한 접두사들은 과거와 단호히 선을 긋고 진정한 가치에 대한 지지를 정당화하는 문학적이면서도 강력한 심리적 방어 기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진정한 가치란 무엇인가"라고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마주하게 된다.

커피 테이스팅에서도 점수 매기기를 넘어서 기호학과 철학 등 문화이론을 접목해 그 이면의 의미를 읽어내려는 시도가 중요해지고 있다. 한 잔의 커피를 혀끝의 감각으로만 쪼개어 평가하는 대신 음용자의 삶에 어떤 서사와 정서적 위안을 제공하는지 묻기 시작한 것이다. 문화이론의 렌즈로 바라볼 때, 파인 로부스타의 묵직함은 물리적 자극에 그치지 않고 지친 현대인의 마음을 감싸 안는 감정의 무게로 다가온다.

'뉴이재명 현상' 역시 낡은 이념의 점수표를 찢어버리고, 국민이 체감하는 실질적 위로와 효능감이라는 문화적·정서적 차원에서 다시 읽힐 필요가 있다. 커피의 오만했던 계급론이 무너지고 파인 로부스타가 스페셜티의 든든한 한 축이 되었듯, 우리 정치도 견고했던 진영의 벽을 넘어 온전한 성과로 평가받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문턱에 서 있다.

박영순 커피비평가협회(CCA)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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