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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수필가

엊그제는 얇은 옷을 입고 나갔다. 봄 바바리를 샀는데 예쁜 우산을 사면 비가 오지 않는다고 허구한 날 춥다. 따스해지기에'에라 모르겠다'싶어 나간 뒤 종일 떨었다. 허둥지둥 돌아오다가 버들개지를 보았다."나처럼 든든히 입어야지"라고 하는 듯 잔뜩 껴입은 털 강아지를 보니 웃음이 났다. 보송보송 일어난 보푸라기가 여전 털외투다. 개울에는 얼음이 녹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때로 겨울보다 추운 봄을 녀석은 알았던 걸까.

봄꽃은 외투를 잘 입는다. 털 달린 외투를 껴입고 봄소식을 전한다. 눈 뜨자마자 털옷을 걸치고 나온 갯버들이 그렇고 무덤가의 할미꽃도 털북숭이다. 잔설이 희끗한 언덕 노루귀 꽃도 털 분홍 자켓을 입었다. 언제 추워질지 모른다고 잔뜩 무장한 것 같다. 얼음 풀린 냇가에 앉아 있으면 손이 시린데 외투 때문인지 한결 따습다.

앞전에 핀 복수초는 털 하나 없이 매끈했었다. 살갗이 트고 곱은 손으로 떨고 있을 줄 알았더니 날개처럼 투명하다. 봄에 피는 꽃들은 뒤늦게 외투를 꺼내 입고 법석인데 훨씬 추울 때, 눈 골짜기 얼음구덩이에서 어쩜 그리 탐스럽고 태연했던 것일까.

변산바람꽃 역시 털옷은 입지 않았다. 복수초보다는 나중에 피지만 꽃샘이 기승을 부릴 때다. 때아닌 춘설이 날리고 얼기도 하는데 털목도리 하나 두르지 않고 맨손으로 봄을 떠받친다. 언제 추워질지 모른다고 털옷을 입는 것도 이색적이나 한겨울 같은 초봄에 꽃잎만 내밀고 뽐내는 것 또한 신선하다.

복수초도 나중에 피었다면 분명 털옷을 걸쳤다. 노루귀와 갯버들 역시 정초에 피었으면 외투를 벗어던졌다. 똑같은 얼음구덩이였건만 겨울의 끝이라 땅속은 그 때까지도 훈훈했다. 외투는 필요하지도 않았고 처음부터 몰랐을 것이다.

잘될수록 조심하랬다. 갯버들이나 노루귀꽃과 할미꽃처럼 언제 추워질지 몰라 털옷을 껴입듯이 준비가 필요하다. 노상 추운 겨울은 비상사태라 무장을 할 텐데 아닌 밤중 홍두깨마냥 추워질 때는 긴장이 풀어져 뜻밖에 사달이 날 수 있다.

처음에는 얇게 입었다. 설마 설마 했다가 연거푸 속으면서 별난 차림으로 적응해 나갔을 테지. 마침내 결론은 끝까지 외투를 벗지 않게 된 그 점이고, 나중에 피는 개나리 진달래 등은 꽃부터 피우는 배짱까지 부렸다. 잎을 틔우려면 봄물이 더 필요했고 그러자니 툭하면 얼어빠지는 통에 물을 적게 받는 꽃부터 피우려 했겠다. 생각한 대로 계속 추워지고 해마다 그런 식이라 별난 방식으로 짓궂은 날씨에 적응해 왔다.

그나마 생략된 채 피면 예뻐 보이질 않으니 필연일까. 참새는 혹 바쁘다고 그냥 갈지 모르나 꽃샘추위는 빠지지 않는다. 봄꽃의 카리스마가 잎도 없는 맨 가지에서 피는 거라면 우리 삶의 카리스마도 운명으로 단련된다.

봄이라면 장독이 얼어터지고 일찍 내놓은 화초가 한 그루쯤 다치는 게 친근하다. 봄꽃도 꽃샘의 발자국 소리 듣고 핀다. 꽃이 피고 푸근해서 봄이 아니라 꽃샘에도 악착같이 꽃 피우고 싹 틔우는 게 봄 시나리오다. 봄 꼭짓점에는 지루한 겨울 피라미드가 깔려 있었다.

흔히 매화가 꽃소식 봉화를 올린다지만 진짜배기 봄꽃은 눈 속에서 이미 피었다. 예쁘기만 해서는 꽃이 아니다. 보통의 꽃들은 그래도 충분하지만 봄 파발 띄우는 꽃이라 남다른 생명력이 필요하다. 눈구덩이 얼음 속에서 피는 봄꽃 메시지가 이 봄에 무척 신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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