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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26.03.02 15:27:48
  • 최종수정2026.03.02 15:27:48

김병규

전 상당고 교장, 현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 수련기획실장

이따금 나의 행동을 이끌어 주고 잘못된 행동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생각하게 된다. 사람이 배우지 않으면 도(道)를 알지 못한다고 하여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도는 여러 모습으로 우리에게 향방을 알려주는 것 같다. 그중에서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은 무엇일까·

얼마 전에 퇴계 선생의 15대 종손 이동은 옹을 소설 「객주」의 작가 김주영이 퇴계 종택에서 인터뷰한 영상자료를 봤었다. 인터뷰 중에 김 작가가 '요즘 세대에 꼭 필요한 덕목이 무어라 생각하시는지요'라 질문드리자 선대 종손 어르신은 주저 없이 '예의와 염치'라 답하셨다. 그 아드님이자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의 설립자이신 이근필 옹도 선비 교육의 핵심 가르침으로 예의와 염치를 강조하셨다.

염치의 사전적 의미는 체면을 차릴 줄 알며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다. 우리 일상에서는 보통 염치를 아네라거나 염치도 모르는 파렴치한 등으로 자주 사용된다. 선비의 공부 요소 중 핵심은 바로 염치로서 맹자의 義에서 비롯된 羞惡之心이니 마땅히 처신하지 못함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이다.

고려말 역동 우탁 선생이 충선왕의 패륜 행위를 비판하며 지부상소를 올린 것은 염치의 대표적 행동이다. 다른 신하들은 왕의 노여움을 살까 두려워 몸을 사릴 때 역동 선생이 감연히 나서서 왕의 부끄러운 잘못을 바로잡아 주는 것이 염치를 아는 신하의 자세라 여겼다. 조선 말기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게 생겼을 때 우국지사들이 단식으로 자정하거나 조상의 신주를 땅에 묻은 뒤에 식솔을 이끌고 간도로 이주한 것도 역시 염치를 중히 여기는 선비정신의 발로이다. 충과 효를 중시하는 선비들은 나라를 빼앗기고도 가만히 있는 것을 차라리 죽음만 같지 못하다 여겼다. 그런 때문에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지 않은 안중근 의사 같은 분도 나오는 것이다.

체면은 염치와 비슷한 의미로 쓰인다. 다만 염치가 자신의 도덕적 기준에 의하여 나타난다면 체면은 주로 사회적 관계와 타인의 시선 평판을 중시하는 부끄러움이니 염치는 내적 도덕 기준에 대한 수치심이요, 체면은 외부의 시선과 평판을 의식한 부끄러움이라는 것이 다르다. 그래서 체면 차림이 있고 체면치레가 생기는 거다. 살다 보면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본인의 의사와는 다르게 다른 사람의 평판을 의식하여 행동해야 할 때가 있다. 회식을 마치고 속마음으로는 식사비도 부담되고 아내의 잔소리도 신경 쓰이면서도 오늘 밥값은 내가 낼게 하면서 카드를 호기 있게 꺼내는 것도 체면치레 때문이겠다. 외국인 눈에는 한국 사람의 식사 후 계산대 앞에서 실랑이를 벌이는 것이 매우 신기한 모습이라는데 우리는 그놈의 체면 때문에 멀쩡한 신발 끈 풀렀다가 다시 매며 머뭇거리지를 못하는 거다. 며칠 전 시골 식당에서 뒷자리 앉은 분이 외국인의 식사비 각자 내는 더치페이를 더티 플레이라고 잘못 말하여 웃으며 들었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워낙 대접하기를 좋아하여 더티 플레이(·)는 부끄러운 일로 여긴다.

겉치레는 염치가 순전히 다른 사람을 의식하여 형식적으로 행동하는 경우로 나타난다. 형식적으로 예의를 차리거나 내용 없이 자기의 외양과 겉모습만 꾸미는 경우이다.

그러니까 예의는 자기 스스로 판단하여 나타나는 모습이요, 체면은 자신의 기준에 외부와 다른 사람을 염두에 두었을 때의 경우이다. 그리고 겉치레는 전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보일 자신의 모습을 살펴 행동하는 것이니 자신의 속마음과 전혀 다른 행동을 하여 이른바 가면으로 나타나는 때도 생기게 된다. 그 구분 준거는 자기 자신이다. 그래서 퇴계 선생 같은 현인도 무자기(毋自欺)를 좌우명으로 삼아 스스로를 조심한 것이리라. 이 시대에 정녕 필요한 것은 예의와 염치이다. TV에 나오는 정치인들의 한심한 작태와 각종 사건의 파렴치범들을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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