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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26.02.19 13:50:06
  • 최종수정2026.02.19 13:50:06

남호순

시인·배바우도서관장

낯선 도시로 향하는 차 안에서나, 익숙한 동네 어귀를 서성일 때나 문득 깨닫는 사실이 하나 있다. 세상 어디를 가도 사실 '색다른 하늘'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푸른빛이 조금 더 짙거나 노을의 잔상이 조금 더 길 수는 있겠지만, 결국 하늘은 하나의 거대한 덮개처럼 우리가 발 디딘 모든 땅을 덮고 있다. 그래서일까. 내가 지금 서 있는 이곳은 언제나 '잠시 머물다 떠나온 곳'인 동시에, 내일이면 다시 '언제든 짐을 꾸려 떠날 수 있는 곳'이 된다. 삶은 결국 정박하지 못하는 배처럼 머무름과 떠남 그 사이의 아득한 경계선 위에 놓여 있다.

강가에 서서 흐르는 물을 바라본다. 사람에 대한 그리움을 지워보려 물결에 시선을 던지지만, 물결은 오히려 내 마음의 갈피처럼 자디잔 주름살을 그리며 번져간다. 흐르는 물에 기억을 흘려보내려 했건만, 물결이 일렁일 때마다 그 굴곡 사이에 박혀 있던 해묵은 그리움들이 자꾸만 고개를 치켜든다. 떠남이란 언제나 발자국 뒤로 긴 그림자 같은 그리움을 남기는 법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그리움의 대상이 나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내 안의 허기는 더욱 절실해진다. 사람이 떠나고 난 빈자리에는 서늘한 바람만이 머물며 그 빈 부피를 증명할 뿐이다.

우리는 흔히 외로움과 그리움을 혼동하곤 한다. 하지만 외로움이 나를 할퀴는 서슬 퍼런 칼날이라면, 그리움은 그 상처를 덮어주는 해진 담요 같다. 그 담요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다림'이라는 시간이 필요하다. 마치 차가운 방에 군불을 때어 서서히 한기를 내몰 듯이, 기다림의 시간들이 차곡차곡 쌓여 뼛속까지 익어야만 그것은 비로소 진정한 그리움이 된다. 덜 익은 기다림은 그저 조급한 갈증에 불과하지만, 잘 익은 그리움은 나를 파괴하지 않고 오히려 내면을 은근하게 데워준다.

밤이 깊어 가면 방 안에는 누군가 머물렀던 온기의 흔적만 희미하게 남는다. 나는 그 따스함을 일부러 외면하려 고개를 돌린다. 온기를 인정하는 순간, 뒤따라올 공허함이 두렵기 때문이다. 차례차례 등 뒤로 밀어내며 떠나왔던 풍경들이 어둠 속에서 환영처럼 되살아난다. 수많은 이별을 겪고 수많은 길을 지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이 지독한 외로움은 결코 익숙해지는 법이 없다. 매번 처음 겪는 통증처럼 낯설고 날카롭다.

마음이 까치가 떠나간 빈 둥지처럼 텅 비어버리는 순간이 있다. 바람이 숭숭 드나드는 그 허한 공간에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고 느껴질 때, 비로소 외로움은 슬그머니 제 자리를 그리움에게 내어준다. 그리움은 외로움보다 점잖고 묵직하다. 마치 황소가 느릿하게 마당에 누워 긴 되새김질을 하며 잠을 청하듯이, 그리움은 지루할 정도로 길고 무료한 기다림의 시간을 견디게 한다.

그 지루한 기다림 끝에 문득 기적이 찾아온다. 봄날, 잘 여물어 있던 꽃눈이 '툭' 하고 제 몸을 열어젖히는 그 미세한 기척처럼, 굳어 있던 마음의 문이 열리는 순간이다. 몸은 여전히 혼자여서 외롭고 쓸쓸할지언정, 그 빈 마음으로 다시 누군가를 향한 '정(情)'이 고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사람이 떠난 자리에 다시 사람이 들어올 준비를 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끊임없이 떠나면서도 다시 어딘가에 머무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지금 내가 발을 딛고 서 있는 이 땅 이거나 이 강도 결국 잠시 머물다 떠나온 곳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곳은 언제든 기꺼이 다시 떠날 수 있는 나의 집이기도 하다. 진정한 집은 고정된 주소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외로움이 익어 그리움이 되고 그 그리움이 다시 정으로 피어나는 내 마음의 행로 속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도 색다를 것 없는 하늘 아래서 잘 익은 그리움 한 점을 품고 또 다른 떠남을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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