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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26.02.11 15:07:13
  • 최종수정2026.02.11 15:07:13

박명애

수필가

겨울날엔 오후 세 시를 사랑하게 된다. 날이 맑으면 더욱 그러하다. 칼바람이 창을 흔들어도 비껴드는 햇살에 마음이 안온해지는 시간. 그곳이 어디든 햇볕은 틈을 찾아 들어와서는 길게 누우며 사물을 데운다. 종종 책을 읽으러 가는 카페 그 자리는 세 시부터 들어온 햇볕이 오래도록 등을 감싸준다. 등에서 햇살의 온기가 차츰 식어가면 일어날 시간이 된 것이다.

오후 세 시쯤이면 우리 집 베란다에는 눈부신 빛이 가득하다. 유리창을 투과해 들어온 따사로운 햇살이 겨울을 건너느라 수척해진 화초들을 감싸면 동백 이파리도 반짝반짝 생기가 돌고, 꽃망울들을 잔뜩 달고 때를 기다리는 중인 게발선인장 줄기도 조금쯤 팽팽해진다. 발등이 시린 날들, 무채색으로 가득한 도시 한구석 햇살과 초록이 어우러져 숨 쉬는 그 공간이 있어 나는 참 좋다. 일상을 내려놓고 물끄러미 오후 세시의 햇살을 즐길 수 있는 일요일이면 더욱. 요즘은 틈만 나면 베란다에서 병아리처럼 햇볕을 쬐며 앉아 있다. 거실에서 베란다로 난 문을 한 뼘 쯤 열어둔 채로. 너무 일찍 온 손님 때문이다.

차갑고 쌀쌀한 날이 이어지던 어느 날. 밤사이 화초들의 안부가 궁금해 베란다를 여는데 서늘한 냉기 속에 달콤하고 매혹적인 향기가 묻어 들어왔다. 천리향이었다. 꺾꽂이한 한 뼘 만한 모종을 얻어왔는데 올해 처음 줄기 끝마다 작고 길쭉한 붉은 꽃망울들이 둥글게 맺히더니 강추위에 꽃을 피웠다. 손톱보다 작은 꽃이 겨우 너댓 송이 피었는데도 베란다는 온통 향기로 가득했다. 생각지 못한 선물을 받은 듯 웃음이 났다.

천리향은 서향이라고도 하는데 하얀 꽃이 피는 백서향은 제주도와 남부 지방에 자생한다. 조선 중기 최립의 문집인 <간이집簡易集>에는 천리향을 노래한 '서향화瑞香花'라는 시가 실려있다. '납월이 지나 매화 전에 꽃이 피었다 種出廬山問幾年'는 표현이 있는 걸 보면 예전에도 매화보다 먼저 온 봄 손님이었나보다. 최립은 천리향 향기를 두고 '천향국색天香國色' 이라고 하였다. 다른 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향기와 색깔이 뛰어나다는 말인데 최립이 본건 붉은 서향이었나보다. 도은 이숭인은 서향을 두고 '사람이 이 꽃을 마주할 때면 모름지기 의관을 갖추고 대해야 하리'라고 적어두었다. 선비의 코에 물씬물씬 다가가 주렴을 걷게 만들고 예를 갖추고 마주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게 했으니 일찍 온 손님의 자태와 향기는 매혹을 넘어 고혹이라 할 수도 있겠다.

천리 가는 향기를 집안에 가두어놓고 옛 선비들의 시를 뒤적이다 보니 잠시 무릉도원이라도 와 있는 듯 삶의 무게들을 잊는다. 입춘이 지났다지만 예기치 않은 된추위에 아직 봄은 먼 듯 긴장이 풀리지 않아 옹송그리고 사는 요즘, 매화보다 먼저 온 손님 덕에 혼자만 봄을 그린다. 새가 껍질을 깨고 나오려 투쟁하듯 그 손님도 오래 그리 준비하고 인내한 끝에 꽃봉오리를 터뜨리고 왔으려니 경건한 마음으로 맞이해야 하겠지. 옷매무새 다듬고 겸손한 마음으로 나의 시간을 살아내야겠다. 햇살은 따뜻하고 오후 세시는 달콤하다. 아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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