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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26.02.09 16:49:50
  • 최종수정2026.02.09 16:49:49

함무성

수필가

거실 창 앞의 '홍송'을 본다. 넓을 弘, 소나무 松자를 따서 이름 짓고 정원 안에 가족으로 심은 나무다. 가지치기로 수형을 다듬으며 스물다섯 해를 함께 살다 보니 어느덧 밑동은 표피를 쩍쩍 가르며 우람하게 자랐다.

긴 겨울밤이지만 잠을 설쳤다. 등 돌려 떠나간 가까웠던 인연에 대한 섭섭함에 이일 저 일이 뒤엉키며 꼬리를 문다. 불필요한 잡념을 분절시켜 주려는 듯 홍송은 밤을 새워 바람을 당차게 불어주었다.

아침을 맞아 소나무와 마주했다. 소나무는 내게 질문하지도, 내 질문에 답하지도 않는다. 나처럼 사소한 일에 고민하지도 않고, 어제처럼, 엊그제처럼 의연하게 침묵만 지킨다. 하늘을 향한 가지와 땅속으로 뿌리를 늘리며 생존의 지혜를 쌓은 채 마치 큰 어른처럼 집을 지켜준다.

낙영산으로 산행 했을 때의 기억이 눈에 선하다. 유독 바위투성이 틈에서 푸르게 자라는 소나무 군락이 있었다. 뿌리를 어느 틈으로 뻗고 사는지, 까마귀 떼만 높이 나는 산중에서 외롭지는 않은지, 고립의 시간을 어떻게 견디며 사는지 궁금하다. 정상의 헬리콥터장을 지나 울창한 숲으로 내려갔다. 그곳에는 해묵은 소나무에 V자로 깊게 파인 흉터를 지닌 몇 그루의 늙은 소나무가 눈에 띄었다. 험한 시대에 살갗을 도려낸 아픔을 견딘 흔적이다. '생로병사'는 그들에게도 있었다.

나무는 자연환경에서 오는 악조건도 침묵하며 인내한다. 세심한 관찰의 눈을 통하지 않고서는 그들이 전하는 속생각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폭염과 가뭄, 추위와 강풍조차 강인한 생명 보존을 위한 과정이라 여기며, 저항심은 뿌리 속에 묻어 두고 견디며 잎으로 말한다. 나무들에게서 인내의 소중함을 배운다. 조용히, 아주 천천히 성장하는 나무들의 표정과 소리를 들음으로써 공동체적 삶이 지향하는 '살아 있음'을 더욱 또렷이 확인할 수 있다.

소나무도 잎갈이를 한다. 봄에 송화 가루를 날린 뒤 새잎을 내고, 가을에는 묵은 잎을 덜어낸다. 활엽수들이 앙상한 가지만으로 겨울을 버틸 동안, 소나무는 겨울 산을 청청하게 지킨다. 그것을 선비의 절개라 부르기도 하지만, 우리에겐 그저 곧 봄이 온다는 푸르른 희망만으로도 족하다. 그 다가올 시절을 알려주는 나무들 앞에서 사람만이 고등 생명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나무도 생각이 많다. 감각과 지각을 동원해 사유한다. 떠도는 흰 구름을 바라보는 즐거움도 알고, 휘몰아치는 겨울 폭풍우에 두려움도 느끼며, 스스로 흔들 수 없을 때는 바람을 간절히 기다리기도 한다. 그 적응력과 끈임 없는 도전은 인간에 비할 바가 아니다.

현대는 인공지능의 발달로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다. 지식은 인터넷을 통해 무한정 퍼 올릴 수 있는 세상이 되었지만, 과학은 인간이 아닌 존재들이 무엇을 경험하고 어떻게 생존하며 번성하는지에 대해서는 보려 들지도 않는다. 오로지 과학적 엄밀성과 경제성만을 강조할 뿐, 지구에서 함께 삶을 공유하는 생명체들에 대해서는 냉혹하다. 인성이 퇴화되어 가는 것을 느끼는 요즘이다. 이 시대에 인공지능을 더욱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활용하려면 인간의 창의력과 감성이 함께 해야 한다. 나무가 사유하고 순명하는 지혜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과학의 결과물과 인간의 인식능력이 결합할 때 우리 삶은 더욱 풍요를 누릴 수 있지 않을까.

오늘 아침에도 나는 마음 눈뜸을 위해 '홍송'을 마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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