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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자

수필가

살다 보면 누군가의 인생이 통째로 내 몸에 스며드는 순간이 있다. 내게는 어머니가 손수 치자 물을 들여 만들어 주셨던 노란 명주 원피스가 그랬다. 팔순을 바라보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신 지도 벌써 여러 해, 거울 속에서 문득문득 어머니의 주름을 발견하는 나이가 되어서야 나는 문득 깨닫는다. 염색은 단순히 옷감에 색을 입히는 행위가 아니라 지루한 기다림을 견디며 서로의 삶을 물 들이는 사랑의 과정이었다는 것을.

빛바랜 앨범 속에 초등학교 입학식 날의 나는 유난히 환하다. 그 시절 기성복이 귀하던 때에 어머니는 직접 베틀에서 짜신 명주필에서 천을 잘라 며칠을 공들여 색을 입히셨다. 커다란 가마솥에서 치자열매를 우려내고 그 뜨거운 물에 하얀 명주 천을 담가 휘휘 저으시던 어머니의 뒷모습이 선하다.

"애야, 물이 골고루 들어야 네 마음도 환해진단다."

어머니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솥 앞에서 땀을 닦으며 말씀하셨다. 치자 물이 천의 결 사이사이로 스며들 때까지 어머니는 서두르지 않고 기다리셨다.

그렇게 완성된 노란 원피스를 입고 학교에 간 날, 담임 선생님은 나를 바라보며 "어머나, 교실에 예쁜 노란 나비 한 마리가 날아 들어오는구나!"라고 칭찬해 주셨다. 그날 나는 정말로 날개를 단 나비가 된 기분이었다.

염색은 정직한 노동이다. 천을 물에 담그기 전 불순물을 제거하는 정련 과정부터 시작해 원하던 색이 나올 때까지 담갔다 말리기를 수십 번 반복해야 한다. 너무 서두르면 얼룩지고 너무 욕심을 내면 탁해진다. 어머니의 삶이 딱 그랬다. 어머니는 자식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당신의 욕심을 걷어내고 평생을 '기다림'으로 사셨다. 남편의 늦은 귀가를 기다리고, 우리 형제들이 학교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우리가 장성해서 제 몫을 다 하기를 기다리며 당신의 속은 켜켜이 무채색으로 변해갔을 것이다. 정작 당신은 무채색 옷만 입으시면서도 딸 아이의 옷만큼은 늘 화사한 치자꽃 빛이나 쪽빛으로 물들여 주셨던 그 마음을 이제야 헤어려본다.

어머니를 닮아가는 시간 어느덧 내가 어머니가 돌아가신 그 나이에 가까워지니 세월이라는 염료가 내 인생이라는 천에 어떤 색을 입혔는지 돌아보게 된다. 젊은 날의 나는 치기 어린 마음이 강력하고 원색적인 삶을 꿈꿨다. 하지만 삶의 풍파를 겪으며 씻기고 말려지는 과정을 반복하다 보니 이제는 자극적인 색보다 은은하고 깊이 있는 자연의 빛깔이 더 귀함을 안다.

거울 앞에 서면 흰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파가 서 있다. 이 흰머리조차 세월이 내게 준 '백색 염색'이라 생각하니 서글픔보다는 평온함이 앞선다. 어머니가 치자 물을 들일 때 그러하셨듯 나 또한 남은 생을 서두르지 않고 우아하게 물들여 가고 싶다. 내 아이들에게 나는 어떤 색의 어머니로 기억될까. 부디 그 노란 원피스처럼 바라만 보아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온기 있는 색이었으면 좋겠다.

염색은 인생이다. 고통스러운 뜨거운 물을 견디고, 찬 바람에 몸을 말리는 인고의 시간을 거쳐야만 비로소 고유의 빛깔을 얻기 때문이다. 오늘따라 치자 물 냄새가 코끝을 스치는 듯하다. 어머니가 만들어 주신 그 노란 원피스는 이제 없지만, 내 마음속의 결에는 여전히 그날의 노란 나비가 살랑이고 있다.

"어머니, 보고 싶어요."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혼잣말이 가슴속에서 진하게 번진다. 어머니가 물들여 놓으신 이 귀한 삶을 나 또한 정성껏 다듬어 다음 세대에게 건네주고 싶다. 인생이란 긴 피륙 위에 각자의 시간을 한 줄기 무늬로 새겨 넣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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