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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경희

객원논설위원

아직 찬바람이 맵지만 봄의 시작인 입춘이다. '띠'가 바뀌는 기준이 입춘이어서 봄과 더불어 새로운 해가 열리는 절기로 본다.

입춘 일엔 봄기운이 들어오는 시간인 입춘 시에 맞춰 대문이나 기둥에 입춘첩을 붙이며 새해를 맞았다. 해마다 입춘 시가 달라지는 것은 절기력이 태양의 움직임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올 입춘 시는 태양이 황경 315도를 지나는 2월 4일 오전 5시 2분이다.

입춘대길 건양다경(立春大吉 建陽多慶)이 대표적 입춘첩으로, '입춘을 맞아 크게 길하고 봄의 따스한 기운이 감도니 경사로운 일이 많으리라'는 축원이다. 입춘첩은 일부러 떼지 않고 두었는데, 입춘첩이 오래 붙어있으면 복이 오래 머무른다는 속설이 있다.

지난 1980년 봄, 최규하 대통령의 취임에 이어 김영삼 김대중과 함께 화려하게 정계에 복귀했던 김종필은 "춘래불사춘이 아닌가. 지금 과연 봄이 온 것인지 아닌지 안개가 가득 끼어있어 잘 알 수가 없다"고 했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은 계절과 무관하게 상징적인 의미로 회자되는 성어지만 정국이 안개에 가려진 듯 혼미한 작금의 입춘상황에도 찰떡처럼 어울리는 말이다.

춘래불사춘은 중국 전한(前漢)시대 11대 황제인 원제(元帝)의 궁녀였던 왕소군(王昭君)을 두고 지은 시의 한 구절이다. 유교를 좋아하여 무제 때부터 국교로 지정됐던 유교를 당대에 꽃피우게 한 원제는 많은 유생들을 등용하여 이상적 유교정치를 꿈꾸었으나 매년 계속된 흉년과 기근으로 인하여 기우는 국력을 감당키 힘든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변방 오랑캐 흉노족의 왕인 호한야선우가 원제에게 사신을 보내 공주를 부인으로 달라는 압력을 넣었다. 북방 흉노족과 전쟁을 막기 위한 화친정책으로 원제는 궁녀 중 한명을 공주로 위장시켜 호한야선우에게 보내기로 한다.

수많은 궁녀들을 그린 초상화 화첩을 가져오라 명한 원제는 그 중 가장 인물이 빠지는 여인인 왕소군을 아깝지 않게 지명했다.

당시 궁정화가였던 모연수가 자신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았던 천하절색 왕소군을 형편없는 추녀로 그려 넣었기 때문에 양귀비, 서시, 초선과 함께 중국의 4대 미인으로 꼽히는 왕소군이 오랑캐의 후궁으로 낙점된 것이다.

왕소군이 떠나며 작별인사를 올릴 때서야 비로소 왕소군의 미모를 확인한 원제는 분기탱천하여 그 자리에서 모연수의 목을 베었다고 한다. 왕소군의 자색에 미련이 남은 원제가 그녀의 거취를 탐색하기 위해 왕소군의 동생을 함께 흉노로 보냈다는 일설도 있다.

흉노의 왕 호한야선우의 부인이 되어 아들을 낳았던 왕소군은 선우가 죽자 흉노의 관습대로 호한야선우의 아들 복주류약제선우에게 재가하여 딸을 낳고 생을 마친 파란의 여인이다.

봄이 왔지만 봄 같지 않다는 '춘래불사춘'이란 시구는 왕소군이 흉노 왕의 후궁으로 끌려갔던 북방의 황량한 봄을 읊은 것으로 당나라 시인 동방규의 시 '소군원'에서 비롯됐다. 정치적 희생물인 왕소군의 가련한 처지를 동정한 동방규가 왕소군의 슬픔을 춘래불사춘이라 표현한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으로 유신체제가 붕괴되면서 자유의 봄을 맞는 듯 했지만 곧 이은 쿠데타로 혼란에 빠졌던 1980년의 어수선한 봄을 은유한 김종필의 적절한 인용 이후 '춘래 불사춘'은 누구나 쉽게 가져다 쓰는 말이 됐다.

입춘이다. 문을 열어 주지 않았는데도 봄이 성큼 들어온 것이다. 그러나 봄이 왔는데도 맥없이 봄을 기다린다. 봄이라고 하지만 봄 같지 않은 봄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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