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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비

시인·중앙대문예창작학과 박사

병오년의 문이 열린 지도 벌써 한 달이 되었다. 뱀처럼 구불거렸던 을사년을 돌아보면 살갗이 서늘해진다. 한 해를 정리하고 새로운 시작을 위해 씽크대를 정리하다, 지난겨울에 친구가 호주에서 보내온 마누카를 발견한다. 뚜껑을 열고 손가락으로 찍어 입에 넣는다. 혀를 감싸는 달콤한 맛이 눅눅했던 기억을 끌고 온다. 호버링하는 작은 벌의 날갯짓처럼 정신없었던 지난 순간들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겉으로는 평온해 보였던 날들, 그러나 그 속에는 설명할 수 없는 피로감과 참았던 말들이 겹겹이 저장되어 갔다. 우리가 절뚝이며 삐걱이는 다리를 건널 때면, 왜 이리 위험한 곳을 가야 하는지 모르는 채 묵묵히 건너가기도 하고, 이유를 알지만 입을 꾹 다문 채 앞만 보고 지나가기도 한다. 벌이 꽃에서 꿀을 얻는데 수많이 시간이 녹아있는 것처럼 우리의 생도 인고의 순간들을 견디며 빛으로 나가는 것이리라. 벌들은 뙤약볕 아래에서 같은 경로를 수없이 오가며 날개를 소모한다. 꽃과 꽃 사이에 매달린 시간은 하루 아침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단맛은 그 과정의 끝에서야 비로소 농축된 모습을 드러낸다. 시련을 통과하지 않은 꿀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달콤한가 혀여 눅진한 피눈물이

병 속에 가득 차 있는 진득한 계절

뙤약볕 거친 노역을 말랑하게 훑는다

손가락을 넣고 휘휘 저어 퍼 올리면

일렁이는 시간을 덧대 꿰맨 울음 조각

후드득 흘러내리는 칼칼한 벌들의 날

입술 안 흐느적거리는 엷은 분홍으로

무심하게 삼키는 날개 잃은 호버링

칸칸이 저장해 놓은 뼈아픈 생의 흔적이여

ㅡ김나비, 「마누카」전문 (『계간문예』, 2024, 겨울호.)

투명한 꿀 병 속에는 보이지 않는 노력의 흔적이 켜켜이 녹아 있다. 벌들이 공중에서 견뎌 낸 계절, 날개가 닳도록 반복한 비행의 흔적이 눈물처럼 고여있다. 사람의 삶도 이와 다르지 않다. 아무 일 없었던 것 같은 해맑은 얼굴 뒤편에도 각자의 방식으로 저장된 저릿한 시간들이 차곡차곡 쌓여있는 것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봄은 올 것이고 희망을 노래하는 사람들 속에 땡볕이 내리쬘 것이다. 달콤한 결과물을 얻기 위해 수많은 날을 견디는 벌처럼 우리도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쓰디쓴 시간 속을 홀로 걸어야 하리라. 마누카 꿀이 오랜 세월을 거쳐 농도를 갖듯, 삶의 결실 또한 비바람과 눈보라 속에서 슬며시 손을 내밀 것이다. 구겨진 뇌 속에 파지처럼 너덜거리는 지난 기억도, 버려야 할 헛된 시간만은 아니리라. 단맛은 대개 오래 견딘 후에야 진한 맛으로 완성되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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