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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애

수필가

며칠 한파가 이어지고 있다. 눈비 예보가 오락가락하며 거리는 다소 한산해진 듯하다. 새벽이면 잠을 깨우던 새소리도 잠잠하고 분주하던 주변의 생활 소음들도 조금쯤 느리게 시작된다. 이따금 들려오던 엘리베이터 알림음도 택배기사가 물건 내려놓는 소리도 뜸해지며 마치 거대한 얼음 안에 갇힌 듯하다. 창을 열고 휘저으면 냉랭한 공기가 쨍하고 부서질 듯하다.

전화기도 얼었는지 평소 자주 울리던 카톡도 조용하다. 덕분에 계획했던 일 중 독서회 다음 도서인 루이제 린저의 <삶의 한가운데>를 오랜만에 다시 읽는다. 늘 숙제하듯 의무감으로 하던 읽기에서 산책하듯 천천히 행간을 옮겨가는 즐거움을 누려본다. 오랜 기간 한 여인을 짝사랑 해온 남자의 시선으로 주인공 니나의 삶을 따라 걸으며 그녀의 감정들을 만난다. 참담한 삶 앞에서도 기꺼이 감내하고 견디며 꼿꼿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는 내게 겨울 눈밭에 길을 내며 홀로 걸어가는 최초의 직립보행 원시인 루시를 떠올리게 한다. '언제든 따뜻한 침대에서 나와 차가운 바닥에 무릎을 꿇는 것'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그녀의 말이 나를 흔든다. 추위가 가져다준 깊고 진한 외로움을 즐기며 지나간 시간을 되새김하고 세상이 던지는 답 없는 물음에 흔들리면서 느슨하게 흘러가던 시간에 균열이 생긴다. 미뤄두었던 장보기를 해야 할까? 꾸물꾸물 겉옷을 챙겨입고 니나처럼 따뜻한 공간에서 탈출을 시도한다.

그래도 오늘은 도시를 온통 흔들던 바람도 잔잔해지고 하늘은 맑고 깊다. 여전히 건물 숲을 돌아 나오는 칼바람에 코끝이 맵지만 마음은 한결 가볍다. 길가 마른 풀숲에서 고양이가 어슬렁거리며 눈치를 본다. 어디서 밤을 보냈을까? 가을에 미리 털갈이 하여 한껏 부풀린 깃털 덕에 통통해보이는 참새들이지만 쓸쓸한 관목숲에 먹이는 있는지 가슴이 아리다.

문득 박노해 시인의 <그 겨울의 시>가 떠오른다. 윗목 물그릇에 살얼음이 얼고 바람에 문풍지가 우는 밤 할머니는 손자를 안고 자며 이불속에서 걱정을 하신다. '오늘 밤 장터의 거지들은 괜찮을랑가/소금창고 옆 문둥이는 얼어 죽지 않을랑가/ 뒷산에 노루 토끼들은 굶어 죽지 않을랑가' 그 말을 시인은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 낭송이라고 했다. 그 아름다운 시 낭송을 자장가로 듣고 자란 시인은 세상에 대한 사랑이 깊어 눈보라 치는 겨울밤 같은 삶을 건너야 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겨울이 없다면/무엇으로 따뜻한 포옹이 가능했겠느냐/ 무엇으로 우리 서로 깊어질 수 있겠느냐/(중략)이 추운 떨림이 없다면 추워 떠는 자의 시린 마음을 무엇으로 헤아리고/ 내 온몸을 녹이는 몇 평의 따뜻한 방을 고마워하고/자기를 벗어버린 희망 하나 커 나올수 있겠느냐(겨울사랑 박노해)'며 '떨리는 겨울, 사랑이 온다'고. 그는 겨울을 사랑했고 나는 그를 좋아했다.

전통시장에 들어서니 겨울용품으로 중무장한 상인들의 목소리가 활어처럼 튄다. 귀를 쫑긋 세우고 삶의 소리를 듣는다. 잔뜩 움츠렸던 나는 늘 자리를 지키는 상인들과 장을 보러 나온 사람들의 온기에 따스해진다. 그렇게 겨울 한가운데를 묵묵히 걸어가는 사람들에게는 생을 껴안고 타인을 데우는 뜨거운 사랑이 있다. 걱정과 사랑을 나누며 니나처럼 박노해 시인처럼 이 겨울을 걸어가봐야겠다.
※ 문둥이 : 현재는 한센인으로 불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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