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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자

수필가

괴산 칠성면 각연사에 발길이 닿았다. 날씨도 우리의 만남을 축복하는지 높고 넓은 하늘은 쪽빛 바닷물처럼 티끌 한 점 없이 맑았다. 가람 안에는 고요가 흐르고, 발자국을 남기기도 아까운 도량은 빗살무늬가 남아있을 만큼 정갈하다. 스님들은 작은 돌과 모래알과 티끌을 쓸어내며 도를 닦고 신도들은 탐진치를 덜어내는 연습을 한다.

병풍을 두른 듯한 가람 안에는 우물처럼 깊은 가을이 내려앉았다.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단풍잎은 아기의 여린 손바닥처럼 곱디곱다. 고요 속에서 나를 들여다본다. 부모 미생전에는 향 사르는 곳에서 수행했던 것처럼 나는 절간에 흐르는 이 고요가 참, 좋다.

오랜만에 대웅전에 들러 향을 사르고 촛불을 밝혔다. 같이 간 초등학교 은사님과 선배 문인 두 분의 소원 성취를 발원했다. 촛불이 눈물을 흘리듯 타들어 가며 소신공양하니, 중생을 구제하는 부처의 법이 촛불 속에도 아른거린다. 늘 말썽을 부리던 무릎이 오늘은 삼배를 올리게 해주니 고맙다고 어루만져 주었다.

사람의 인연이 참 묘하다. 초등학교 문예 특활반에서 맺은 작은 인연의 한 조각이 여성 백일장 참여로 이어지며 마침내 마지막 퍼즐이 맞춰지듯 하나로 닿았다. 마치 불가에서 말하는 인연처럼 우리의 만남도 보통의 인연은 아니지 싶다.

여성백일장 심사위원으로 오신 선생님은 세월의 흔적이 더해져 계셨지만, 나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젊고 기개 넘치던 65년 전 모습은 사라졌으나 문학 분야에 큰 어른으로 우뚝 선 현재의 모습은 더 깊고 빛나 보였다. 순간, 가슴이 울렁거렸다. 생각도 못 하고 살았는데 선생님을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마치 꿈만 같았다. 선생님은 구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정정하셨고, 정신도 맑았다.

그날, 처음 뵙고 스치듯 지나간 세 번의 만남이 아쉬웠던 차에 선배 문인의 전화를 받았다. 은사님도 함께하는 자리였다. 이렇게 시간을 맞추기도 어려운데 우리 네 사람이 한자리에 모이게 된 것도 각자가 쌓은 공덕이 이어준 결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가 글을 쓰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만나지 못했을 것 같다. 같은 지역에 산다고 해서 다 만나지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가을이라는 계절 탓일까. 오랜만에 다시 만난 선생님의 뒷모습이 유독 쓸쓸해 보였다. 노환과 질병으로 고통받는 아내가 안타까워 쓰디쓴 연기로 마음을 날려 보내는 선생님 모습에는 깊은 고뇌와 쓸쓸함이 묻어 있었다. 부부의 인연으로 몇십 년을 살아왔는데 왜 아니겠는가.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 가을산이 그림처럼 내려앉은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가장 연장자인 선배님께서 끓여온 호박죽을 내놓았다. 뚜껑을 열자 노란 호박죽에서 구수하고 달콤한 냄새가 가득 올라왔다. 나는 생각도 못 했는데, 선배님의 마음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우리는 해를 품은 호박죽에 정과 인연을 더해 깊고 넉넉한 맛을 나누며 행복해했다.

우연히 만들어진 하루의 인연이 짧게 저물어 갔다. 아니, 우연히 만났다고 하지만, 문학이라는 매개체가 있기에 우리는 만났으리라. 때가 되면 잎을 매달고 꽃을 피우는 나무처럼 우리도 깊어지는 가을날에 만나야만 할 이유가 있었으리라. 마치 시절 인연처럼 말이다.

오늘이 즐거워 갈지자로 쓰는 글 속에는 자꾸만 '인연'이란 수를 눌러 담게 된다. 스치는 것도 인연이오. 떠나는 것도 인연이 다함이라 끊어내는 법도 배워야 함을 문득 깨닫는다.

삶을 돌아보면 과한 욕심 때문에 마음이 버거웠던 적이 많다. 제석천에 가서 심판받게 된다면 저울 눈이 한쪽으로 기울어질 듯하다. 지수화풍으로 흩어질 인생이니 욕심을 덜어내며 가볍게 살다 가는 법도 이제 조금씩 배워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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